[허영만의 ‘자전거 식객’] 살짝 벌린 입 속 노란 속살…만리포 홍합, 봄바다를 삼켰네

입력 2011-03-16 07:00:00
카카오톡 공유하기
프린트
공유하기 닫기
1. 만리포 해변 북단에 솟은 갯바위에 올라 자전거 코스를 살피고 있는 필자. 멀리 바다로부터 해무가 신비로운 아우라를 머금은 채 육지쪽으로 밀려들어오고 있는 것이 보인다.2. 아침에 일어나보니 바깥에 놓아뒀던 자전거 헬멧에도 눈같은 서리가 내려있었다. 헬멧 테두리 부분에 깨알같이 적힌 글씨들은 자전거 전국일주 중 거쳐간 주요 지명들을 적어놓은 것이다. 전국일주가 완성되면 저 글씨들이 헬멧을 3바퀴쯤 돌게될 것이다. 글씨 위의 그림은 허영만 화백이 싸인펜으로 그린 작품.3. 텐트 야영 중 커피를 끓이고 있는 자전거식객들. 사진에서는 냄새를 알 수 없지만 이 사진이 촬영되고 있는 지금 이 순간, 텐트 안에는 이가체프 커피의 향기가 그득하다. 하루의 고된 라이딩이 끝나고 마시는 한잔의 핸드드립 커피는 자전거 식객들이 누리는 작고 소박한 여유.4. 신두리 해변 한귀퉁이의 풍경. 양식용인지 건축물의 잔해인지 알 수 없으나 드넓은 모래해변에 줄지어 박힌 목재말뚝들이 사진 속에서 오브제 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다.

1. 만리포 해변 북단에 솟은 갯바위에 올라 자전거 코스를 살피고 있는 필자. 멀리 바다로부터 해무가 신비로운 아우라를 머금은 채 육지쪽으로 밀려들어오고 있는 것이 보인다.
2. 아침에 일어나보니 바깥에 놓아뒀던 자전거 헬멧에도 눈같은 서리가 내려있었다. 헬멧 테두리 부분에 깨알같이 적힌 글씨들은 자전거 전국일주 중 거쳐간 주요 지명들을 적어놓은 것이다. 전국일주가 완성되면 저 글씨들이 헬멧을 3바퀴쯤 돌게될 것이다. 글씨 위의 그림은 허영만 화백이 싸인펜으로 그린 작품.
3. 텐트 야영 중 커피를 끓이고 있는 자전거식객들. 사진에서는 냄새를 알 수 없지만 이 사진이 촬영되고 있는 지금 이 순간, 텐트 안에는 이가체프 커피의 향기가 그득하다. 하루의 고된 라이딩이 끝나고 마시는 한잔의 핸드드립 커피는 자전거 식객들이 누리는 작고 소박한 여유.
4. 신두리 해변 한귀퉁이의 풍경. 양식용인지 건축물의 잔해인지 알 수 없으나 드넓은 모래해변에 줄지어 박힌 목재말뚝들이 사진 속에서 오브제 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다.

6.광천~서천<하>
식도락가 발길 잡는 만리포 남쪽 모항
막된장 찍어 광어회 몇 점 먹고 “뭐 더 없나” 두리번


5천원에 산 홍합 한바가지 양은냄비에 털어넣고

파·마늘만 대충 썰어 넣었는데도 그럴싸
뽀얗게 우러난 국물 한숟갈 입안 가득 떠 넣으니
백리 천리 만리…바다향 퍼지네


신두리 해안에 텐트를 설치하는 동안 태양은 사구 너머, 서해의 수평선 아래로 빠르게 잠겨갔다. 조류가 바뀌며 소리 없이 들어온 밀물이 신두리 사구 바로 아래에서 찰랑댔고 바다에서 육지로 끝없이 불어오던 바람은 잠시 호흡을 가다듬는 듯 멈췄다.

낮 동안 육지가 햇볕에 데워지며 발생한 상승기류가 불러온 해풍이 해가 저물며 육지가 식어가자 기세가 꺾인 것이다.

해가 떠있는 동안에는 완연한 봄 날씨더니 날이 저물자 곧바로 다시 겨울이 찾아왔다. 기온은 일몰과 함께 영상 5도에서 영하 5도로 곤두박질쳤다. 초속 12m의 삭풍 속에서 체감온도 영하 30도를 뚫고도 씩씩하게 자전거를 달린 게 불과 한 달 전인데, 그새 봄 날씨에 적응된 몸은 겨우 영하 5도에도 뼛속까지 어는 것 같은 추위를 느낀다.

입김이 설설 나는 텐트 안에서 손을 비벼가며 스토브를 피우고 커피를 내려 나눠마시자 비로소 손발에 온기가 돈다. 커피는 겨울이 시작된 이후 자전거 식객들의 전국일주 투어에서 없어서는 안 될 필수 기호품이 되어가고 있다.

커피콩을 갈아 가루로 만들 수 있는 그라인더와 그 커피가루를 걸러낼 수 있는 필터를 갖고 다니다 야영 중 한잔씩 나눠 마시는 것은 길 떠난 나그네들의 소박한 여유.

자전거 식객 중 커피가 없으면 못 살 정도의 커피 중독자는 없다. 그저 추운 밤, 스토브에 물을 끓이고 커피콩을 사그락 사그락 갈아 필터에 넣고 끓는 물을 부어 한 잔의 커피가 완성될 때까지의 다소 복잡한 과정과 그 과정에서 은은히 퍼지는 향기에 작은 위로를 받는 것일 뿐. 애벌레처럼 침낭으로 몸을 감싸고 비스듬히 누워 커피를 홀짝이며 노트북 컴퓨터로 그동안 우리들이 지나온 길의 GPS데이터를 살펴본다. 당진, 서산 태안지역에서 석 달 동안 우리의 자전거 바퀴 자국은 어지러웠다.

강화도에서 출발해 해안을 따라 매끈하게 그려져 온 궤적이 겨울을 맞은 이 부분에서는 우왕좌왕. 워낙 해안선이 들쭉날쭉 복잡한 곳이기도 했지만 12월, 1월의 극심한 한파와 미끄러운 도로사정으로 인해 예정됐던 거리를 소화해내지 못한 탓에 가고자했던 곳을 들르지 못하고 예정에 없던 곳에서 밤을 맞았기 때문이다.

날씨와 환경에 관계없이 단 1cm의 단절도 없이 꾸준히 자전거 길을 이어가는 것은 당초 생각했던 것보다 힘겨운 일이었다. 이제 태안반도를 마치면 홍성, 보령, 서천, 군산으로 이어지는 남행길은 훨씬 순조로울 것이다.


● 가로림만 뻘밭의 고생 잊고 다시 비포장도로 도전

아침에 텐트에서 기어 나와 보니 밤사이 서리가 내려 모든 것이 하얗다. 바깥에 세워두었던 자전거는 물론 배낭, 신발들도 눈을 맞은 듯 두꺼운 서리가 앉아있었던 것이다. 밤에 기온이 더 떨어졌던 듯 텐트 내부에도 우리들의 호흡에서 나온 습기가 얼어붙어 텐트를 건드릴 때마다 얇은 얼음조각이 우수수 떨어진다.

해가 높이 뜰 때를 기다려 텐트의 얼음을 모두 털어내고 잘 말린 뒤 수납하는 게 원칙이겠으나 오늘도 갈 길이 멀어 그럴 여유는 없었다.

3.5km에 달하는 신두리 해변의 모래밭길에서 또 하루의 페달링이 힘차게 시작됐다. 바퀴가 살짝 빠지는 모래밭을 휘청거리며 주파해 의항포구가 건너다보이는 해안의 끝에 도달하자 영하의 추위임에도 불구하고 아침 워밍업으로는 좀 과하다 싶을 만큼 땀이 뻘뻘 난다. 소근진성에서 만난 농부에게 길을 물어봤다.

“의항리를 거쳐 만리포 방향으로 가려는데 아스팔트길 말고 농로나 흙길이 없을까요?”

“자전거 타는 사람들은 다들 32번 지방도로 다니는데 왜 이리로 왔어요? 의항리로 연결되는 해안도로가 있긴 하지만 중간에 끊겼을 텐데….”

원래 오래된 비포장도로가 있는데 포장공사를 준비하느라 중간에 흙을 쌓아놓아 자전거로 가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걱정이다. 농부는 송현저수지쪽으로 우회해 송현삼거리에서 32번 지방도로를 만나 만리포로 가는 것이 정답이라고 일러줬다.

하지만 송현삼거리쪽으로 가는 코스는 현재 위치에서 만리포로 가는 가장 가까운 길인 것이 확실하지만 그 길로 가게 되면 중간에 백리포나 천리포는 건너뛰게 된다. 게다가 자동차들이 쌩쌩 지나가는 아스팔트 도로를 진저리치도록 꺼리는 우리들이 아닌가.

길을 택해야하는 순간이 왔을 때 자연스럽게 말없이 서로를 쳐다보게 된다. 멤버들의 표정에서 ‘고생할 준비가 되어있다. 거친 길로 가자’는 메시지가 읽히면 이심전심 오프로드로 들어서는 것이다. 비포장도로를 선호하는 경향 탓에 물론 생고생도 많이 했다.

어제만 해도 가로림만의 뻘밭을 진흙투성이가 되어 쇠똥구리처럼 굴러다녔었다. 길을 잘못 들었을 때는 후회막심이지만 일단 빠져나오고 나면 금방 고생스러움을 잊어버리고 다시 험한 길을 찾게 되니 마약도 이런 마약이 없다. 이번에도 자전거식객들은 사투에 가까웠던 어제의 고생을 까맣게 잊고 멀쩡한 아스팔트길 대신 흙먼지 풀풀 나는 해안도로를 택했다. 의항해수욕장으로 뻗은 농로는 자동차가 한 대도 없어 호젓했다. 상쾌한 아침 공기를 폐 깊숙이 끌어들이며 부드러운 흙길을 날듯이 달려 나간다.

모항의 노점 좌판에서 구입한 홍합으로 홍합탕을 끓였다. 홍합 속살도 굵고 실했지만 세월의 더께가 정겹게 내려앉은 찌그러진 양푼 덕분에 더 맛있었다.

모항의 노점 좌판에서 구입한 홍합으로 홍합탕을 끓였다. 홍합 속살도 굵고 실했지만 세월의 더께가 정겹게 내려앉은 찌그러진 양푼 덕분에 더 맛있었다.



안개 품은 바다, 그녀 안은 바람 아∼ 만리포라 내 사랑


해저문 해변, 칼바람에 뼛속까지 얼얼
애벌레 마냥 침낭 속 몸 웅크리고
은은하게 퍼지는 커피향에 언 몸도 사르르

밤서리 맞은 신발 탈탈 털어 신고
바퀴 푹푹 빠지는 모래밭길 뚫어
뻘밭 고생 언제인냥 힘차게 밟는 만리포
갈매기 노래하는, 만리포라 내 사랑


하지만 우리는 잠시 뒤 왜 이 길에 자동차가 없는지 설명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상황에 맞닥뜨렸다. 농부의 경고대로 곳곳에 덤프트럭 수십 대 분량의 흙더미가 작은 산처럼 쌓여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길은 가파른 언덕이 많고 뱀처럼 이리저리 굽어 숨이 턱에 찬다.

하지만 굽은 길은 그 나름의 정취가 있었고, 힘겨운 오르막이 있으면 쏜살같이 내리꽂을 수 있는 내리막이 있어 어제의 가로림만 수렁길과는 다른 맛이 있었다. 바로 이런 맛 때문에 또 다시 길을 선택해야할 때 망설임 없이 험로를 택하는 것일 게다.

의항을 거쳐 백리포 뒷산을 허위허위 넘자 오른편으로 태안해안국립공원 구역의 일부인 광활하고 아름다운 백사장이 짙은 해무에 휩싸인 채 봄볕 아래 길게 누운 모습이 신비롭다.

천리포수목원을 끼고 달려 만리포에 이르자 경치가 황홀해 더 이상 자전거에 올라앉아있기 어려웠다. 천리포와 만리포는 바로 이웃한 해변으로 그 사이에 작은 바위산 하나가 바다 쪽으로 돌출되어 경계를 이루는데 그 산을 에돌자마자 시원하게 펼쳐진 만리포 해안이 시야 가득 들어온다.

자전거를 세워두고 길가 벤치에 앉아 만리포 해변을 시야에 가득 넣자 그 장쾌한 경치에 가슴 속에서 오케스트라의 심벌즈가 울리는 것만 같다. 푸른 하늘, 밝은 햇살, 파란 바다, 끝이 가물가물할 정도로 넓은 백사장, 그리고 끝없이 밀려들어오는 파도…. 이날 만리포 풍경의 하이라이트는 바다안개였다.

서풍에 밀려온 안개는 백사장에서 자욱하게 흩어져 해변을 걷는 사람들의 모습이 안개의 장막 속에서 어른어른 거린다. 안개의 유혹을 못 이기고 자전거를 타고 해변으로 내려서서 환호를 내지르며 만리포의 처음부터 끝까지 달렸다.

만리포 해변을 달리는 나그네들. 자전거로 모래길을 달리는 도중 안개가 밀려들어오자 바다와 하늘과 땅이 구별되지 않는 몽환적 판타지가 연출됐다.

만리포 해변을 달리는 나그네들. 자전거로 모래길을 달리는 도중 안개가 밀려들어오자 바다와 하늘과 땅이 구별되지 않는 몽환적 판타지가 연출됐다.



● 찰진 식감에서 봄 정취 만끽…모항서 만난 홍합탕

만리포 남쪽, 자연산 횟감이 싸고 싱싱하기로 식도락가들 사이에 소문이 난 모항에 도착한 것은 오후 1시. 선창에 비닐막을 쳐놓은 간이식당으로 들어갔다. 노점의 좌판에서 해물을 사서 가져오면 반찬 제공과 함께 요리만 해주는 식당이다. 노점에서 광어를 사고 난 뒤 그냥 오기 뭐해서 홍합 한 바가지(5000원)를 함께 샀다.

자전거로 해안선 일주를 하는 중인지라 수많은 횟집들을 지나게 되지만 그동안 무슨 이유에선지 메뉴로 생선회를 택한 적이 없다. 배가 고팠던 참이어서 풋고추, 마늘, 막된장과 함께 광어회 접시 쪽으로 젓가락질이 분주하다.

광어회 몇 점으로 일단 허기를 달래놓자 그때서야 함께 상에 올라와있는 홍합탕에 눈길이 갔는데 손으로 뚝뚝 부러뜨려 넣은 파와 칼자루로 대충 찧은 마늘이 들어간 양념의 전부다.

첫번째 홍합을 까먹은 막내 김경민의 표정이 오묘해졌다. 허영만 화백의 화실 문하생 출신의 일러스트레이터인 김경민은 전남 순천 태생으로 나름 해물의 맛을 아는데 그의 표정만으로도 홍합탕이 예사 맛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결과적으로 이날 점심의 메인 메뉴는 광어가 아닌 바로 이 홍합탕이었다. 부드럽지만 찰진 식감에 싱싱한 해물 특유의 향이 일품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맑고 깔끔한 국물은 인공조미료 한 톨 안 쓰고도 극상의 맛을 전해줬다. 홍합탕을 담은 ‘양은냄비’는 얼마나 오래 썼는지 여기저기 찌그러지고, 깨끗이 닦은 수세미자국이 선명했지만 움푹 팬 부분엔 불질로 인해 생겨난 검댕이가 그대로 남아있었는데 그 냄비의 모양이 더욱 식욕을 자극한 듯하다.

봄은 5000원의 행복, 모항의 홍합탕 속에 들어있었다.

송철웅 아웃도어 칼럼니스트 timbersmith@naver.com
사진|이정식 스포츠 포토그래퍼 moto1444@hanmail.net




뉴스스탠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