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올리스트 가영(붉은 드레스)과 동백유랑단.
가을밤, 광림아트센터 장천홀은 마법진에 갇힌 환상의 공간처럼 느껴졌다.
비올리스트 가영과 동백유랑단이 불러낸 음악은 시공간을 훌쩍 벗어나 관객들을 흥분과 감동의 세계로 밀어 넣었다. 북유럽의 선율로 시작된 음악 여행은 광안리 바닷가의 낭만을 지나 남미의 격정적인 리듬까지, 쉼표없이 이어졌다.
‘Danny Boy’의 애절한 선율은 색소포니스트 이병주의 연주로 깊은 맛을 냈고, ‘The Violin Maker Jun’은 바이올린, 비올라, 피아노, 드럼의 환상적인 조화를 완성했다.
가영은 자작곡과 직접 편곡한 레퍼토리도 다수 연주했다.
대표적인 자작곡은 ‘광안리 블루스’. 가영은 “원래 해운대를 염두에 두고 곡을 쓰기 시작했는데, 쓰다보니 광안리의 이미지로 가버려 어쩔 수 없이 광안리 블루스가 되어버렸다”고 했다. “부산 사람들에게 해운대와 광안리는 매우 다른 느낌과 영감을 주는 곳”이라는 설명도 있었다.
공연 후 커튼콜에서 관객에게 인사하는 가영(맨 오른쪽)과 동백유랑단.
가영은 두 개의 개별적인 곡을 교묘하게 묶고 섞어 ‘익숙한 듯 낯선’ 곡들도 연주했는데, 이게 은근히 ‘맛있는’ 음악이 되었다. ‘Habanera with El null’와 ‘Dark eyes with Csardas’는 이국적인 선율과 리듬이 돋보인 ‘융합 곡’. 스페인의 열정적인 ‘하바네라’ 리듬과 애절한 러시아 민요 ‘검은 눈동자’, 그리고 헝가리 집시 음악의 정수를 보여주는 ‘차르다시’까지, 가영과 동백유랑단은 ‘음악의 여행자’답게 다양한 장르를 자유자재로 넘나들었다. 특히 Dark eyes with Csardas에서 조혜운의 바이올린은 확실한 돋을새김이었다.
바이올린과 비올라는 확실히 잘 어울리는 악기적 궁합을 갖고 있다. 바이올린과 첼로보다 희귀한 조합이지만, 개인적으로는 왜 작곡가들이 이 둘의 조합에 관심을 덜 보여왔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이날은 바이올린을 사이드로 슬쩍 밀어내고 비올라가 센터를 차지한 것도 눈길을 끈다. 뭐가 호탕한 맛이 있다.
비올리스트 가영
탱고, 재즈, 퓨전과 같은 비클래식 레퍼토리를 연주할 때의 ‘가영’과 클래식 바이올리니스트 ‘김가영’은 당연히 같은 인물이지만, 콘서트에서 보면 완전히 다른 캐릭터라는 것도 흥미진진하다.
어느 쪽이 우월한가라는 질문은 물냉면과 비빔냉면의 우열을 가리는 것만큼이나 부질없는 노릇이지만, 개인적으로는 ‘가영’ 쪽의 공연을 더 많이 보았던 것 같다.
클래식의 문을 열고 나온 ‘가영’은 ‘김가영’에 비해 더 도전적이고, 도발적이고, 대중 친화적이다. 고양이로 치면 집고양이와 야생 삵의 차이다. 그에게 늘 ‘스타 비올리스트’라는 태그가 따라다니는 데에는 아무래도 이쪽의 영향이 좀 더 클 것이다.
가영과 동백유랑단이 장천홀 로비에 마련된영과 동백유랑단이 장천홀 로비에 마련된 포토월에서 손가락 하트를 만들어 보이고 있다.
퍼커셔니스트 이경민은 드럼, 카혼, 장구를 부지런히 오가며 ‘퓨전’과 ‘크로스오버’의 진수를 보여주었다. 크로스오버 피아노 이동욱의 연주에서도 자유로운 여행자의 느낌이 물씬했다.
가영은 “전국은 물론 세계를 유랑하고 싶어 결성한 동백유랑단인데 창단하자마자 부산, 경남지역의 러브콜이 쏟아지는 바람에 올해는 본격적인 유랑을 못 떠난 감이 있다”라며 “오늘이 첫 서울 유랑인데 많은 분들이 공연장을 찾아주셔서 감사하다”고 했다. 가영과 동백유랑단이 답례로 준비한 앙코르곡은 척 맨지오니의 ‘산체스의 아이들’이었다.
가영과 동백유랑단에게 아마도 2025년은 ‘진짜 유랑’을 시작하는 원년으로 기록될 것 같다. 이 정도로 유니크한, 그리고 매력과 중독성을 장착한 음악을 가졌으니 세계 유랑도 시간문제다. 이들의 음악 여정을 응원한다.
아니, 응원하지 않을 수 없게 되어 버렸다.
양형모 기자 hmyang0307@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