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희진 삼성화재 신임 감독. 스포츠동아DB
여전히 실업배구시절 8번의 우승과 V리그 8번의 우승을 자랑하는 대형 깃발도 함께 훈련장의 벽을 장식했다. 새 시즌을 앞두고 트레이드로 삼성화재 유니폼을 입은 김시훈에게는 가장 부러운 역사지만 아쉽게도 2013~2014시즌 이후에는 새 우승 깃발이 추가되지 못했다.
2019~2020시즌 5위의 성적에 그친 삼성화재는 신진식 감독과의 계약을 끝내고 제 4대 감독으로 고희진 감독을 선임했다. 프로스포츠 최초의 1980년생 감독이다. 삼성화재에서 선수로 시작해 코치를 거쳐 감독이 된 첫 사례다. 경상남도 남해에서 태어나 중학교 때 꼭 성공해야 한다며 스스로 다짐하면서 남해대교를 건넜다던 그가 V리그 감독에 오르자 남해 군수가 축하의 전화까지 해줬다. “배구가 아니었다면 시골에서 다른 일을 했을 지도 모른다”는 그는 그래서 더욱 배구에 감사한다. 많지도 어리지도 않아서 흔들림이 없을 불혹(不惑)의 나이에 찾아온 기회가 독이 든 성배가 될 수도 있지만 인생을 걸어보기로 했다.
새로운 시즌을 앞두고 본격훈련을 시작한 삼성화재와 고희진 감독은 지금 변화를 입에 달고 산다. 선수들이 훈련을 시작하기에 앞서 외치는 구호도 ‘삼성’이 아닌 ‘변화’다. 과거의 화려한 영광은 갈수록 퇴색되는 가운데 더 이상 옛날의 추억에만 머물지 않고 새로운 무엇인가를 해야겠다는 젊은 감독의 시도는 여기저기에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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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이 되자 그는 가장 먼저 훈련장의 코트를 2개면으로 늘려달라고 요청했다. 구단은 즉시 들어줬다. 같은 훈련시간에 좀 더 효율적으로 훈련하기 위해서는 하나의 코트보다는 2개가 좋다는 것은 이미 입증됐다. 좋은 성적을 내기 위해서 땀은 필요하지만 더 많은 시간동안 선수들을 쥐어짜기보다는 집중과 충분한 사전준비, 왜 이 훈련을 하는지 구성원 모두가 먼저 이해를 하고 공감하면서 훈련의 효율성을 높이자는 것이 새 감독의 뜻이다.
대형 TV화면으로 매일 훈련의 메뉴를 디테일하게 적어놓고 설명한 뒤 훈련은 시작됐다.
감독은 선수들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많은 공을 들이고 있다. 삼성화재 주장 시절, 후배들과 ‘밀당’을 잘했고 팀의 분위기를 잡는데 큰 역할을 했던 그지만 더 많은 소통을 위해 입이 아니라 먼저 귀를 열었다. “내가 하라는 대로만 하면 된다”던 전설적인 전임감독이 했던 방식이 아니라 동등한 위치에서 선수들과 대화로 왜 이 힘든 운동을 해야 하는지 납득을 시켜서가면서 선수들이 스스로 훈련의 당위성을 찾도록 만드는 과정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숙소의 휴게실도 새롭게 꾸몄다. 그동안 선수들은 방에 들어가면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휴게실은 웨이트 트레이닝 용품이 쌓인 창고처럼 사용됐지만 지금은 카페로 바뀌었다. 감독은 선수들이 언제든지 휴게실에 나와서 편하게 쉬는 놀이터로 쓰라고 했다. 휴게실에서 컴퓨터로 게임도 마음껏 할 수 있다. 예전 삼성화재의 팀 문화를 상징했던 밤 10시 무조건 취침, 휴대전화 반납, 새벽 6시30분 새벽훈련 전에 모두가 체중을 재는 것들도 사라졌다. “방에 들어가서 혼자 지내는 것보다는 동료들과 함께 어울리면서 서로 친해지는 것이 팀에는 더 좋다. 게임을 하라고 해도 프로선수인 이상 몇 시간 하지도 않는다”고 감독은 말했다.
오후 훈련을 마치면 선수들에게 밖에 나가서 머리도 식히고 오라고 했다. 그래도 아직 선수들은 새로운 변화를 쉽게 받아들이지 않는 모양이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야간 자율훈련에 10명 이상 나오고 있다. 감독은 본격적인 훈련에 앞선 준비과정 때도 이전과는 다른 프로그램을 선택했다. 체력담당 파트에 수중훈련 메뉴를 요청했다. 긴 휴가와 이전 시즌의 무리로 정상의 몸이 아닌 선수들을 위해 물속에서 코어근육과 관절의 근육을 강화하는 프로그램을 추가했다. 부상방지에 더 신경을 써서 팀의 전통이었던 설악산 정상까지 달리기도 없앴다.
삼성화재 고희진 신임 감독(오른쪽)과 황경민. 스포츠동아DB
감독은 지난 11일 첫 훈련 때 “처음이라 모든 것이 어색할 것이다. 나도 코치들도 처음이다”면서 솔직하게 얘기했다. 그는 당분간 주변에서 많은 조언을 들으려고 한다. 외국인선수 선택을 앞두고는 선수들에게도 의견을 물어봤다. 어차피 결정은 감독이 하겠지만 먼저 그런 얘기를 깨냈다는 것이 중요하다. 선수들을 방관자가 아닌 참여자로 만들어 함께 가자는 뜻이다. 똑똑한 혼자가 아니라 집단지성의 힘으로 함께 변화를 만들자는 것이 감독의 꿈이다.
그는 “감독과 선수들의 생각이 다른 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동안 우리가 쌓아올린 성공 사례가 아니라 상대 팀의 실패사례에서 더 많은 것을 배우려고 한다.” “변화는 내가 말하는 것이 아니고 선수들이 코트에서 하는 우리의 배구를 보고 팬들이 변화를 느껴야 한다.” “다른 팀 선수들이 부러워하고 우리 팀에 오려고 하는 즐거운 팀 문화를 만들고 싶다”고 했다. 지금은 모든 팀들에게 희망이 더 크게 보이는 시기다. 감독은 잘 나갈 때보다는 힘들 때 구성원들과 원 팀, 한 마음이 되느냐 아니냐에 따라 운명이 갈린다. 현역시절 누구보다 감독의 마음을 잘 헤아렸던 그가 어떤 감독으로 스스로를 완성해나갈지 궁금하다.
용인 | 김종건 기자 marco@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