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력 안요한. 사진제공|KOVO
‘2020제천·MG새마을금고컵 프로배구대회(KOVO컵)’ 남자부 우승팀 한국전력 장병철 감독(44)은 진기한 기록 하나를 세웠다. 2009년 삼성화재가 우승한 대회에서 최우수선수(MVP)로 선정된 그는 이번에 KOVO컵과 4번째 우승 인연을 이어갔다. 11년 전에는 MVP에 올랐지만 정규시즌을 앞두고 미련 없이 선수생활을 마감했다. 그 뒤 V리그로 되돌아오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렸다.
실업선수로 뛰고, 배구 외의 다른 인생도 살아본 뒤 2016년 한국전력 신영철 감독의 부름을 받았다. 그해 한국전력은 KOVO컵에서 처음 우승했다. 팀의 막내코치 때였다. 다음 해에는 김철수 감독을 도와 수석코치로 연속우승의 기쁨을 맛봤다. 이번에는 감독으로 우승 헹가래를 받았다. 4차례 우승을 다양한 위치에서 경험한 그에게 소감을 묻자 “주변에 큰 기대감을 안겨서 다가올 시즌이 더 걱정된다”고 답했다.
사실 감독에게 과거는 중요하지 않다. 미래만 있고, 다가올 일에 대비하면서 먼저 걱정부터 하는 자리다. 무엇보다 감독은 중요한 결단을 잘 내려야 한다. 다행히도 장 감독이 비시즌에 내린 3차례 선택은 모두 성공했다. 그 덕에 KOVO컵 정상에도 섰다.
첫 번째와 두 번째 선택은 자유계약선수(FA) 시장에서 박철우(35)와 이시몬(28)을 영입한 것이다. 우리카드 FA 나경복 영입에 실패하자마자 미련을 접고 과감하게 대타로 선택한 카드가 박철우였다. 박철우는 결승전에서 왜 팀에 필요한 선수인지를 입증했다. OK저축은행에서 영입한 FA 이시몬도 그랬다. 팀의 리시브 안정을 위해 데려온 그가 잘해줬기에 외국인선수 카일 러셀의 능력은 더 빛났다.
마지막 선택은 더 극적이었다. 방법이 보이지 않던 가운데 찾아낸 새로운 길이었다. 계속 센터를 보강하려고 노력했다. 시즌이 가까워오는데도 센터를 못 구한 상황에서 장 감독의 눈에 들어온 것은 훈련 때 스태프의 일원으로 함께 경기하던 통역 안요한(30)이었다. 가끔 머릿수를 맞추려고 뛰던 그의 배구실력이 녹슬지 않았음이 머리를 스쳤다. “레프트를 했기에 기본기는 있었고, 센터를 해도 충분하겠다는 생각에 설득을 결심했다”고 장 감독은 털어놓았다.
아내의 첫 출산을 앞둔 안요한에게 “배구선수로 뛰는 모습을 태어날 아이에게 보여줘야 하지 않겠느냐”고 제의했다. 그는 사우디아라비아와 아랍에미리트(UAE) 대표팀 감독을 지낸 아버지 안병만 씨, 1980년대 실업배구 선경에서 여자배구 최장신 센터로 활약한 어머니 권인숙 씨의 훌륭한 유전자를 받은 배구인 2세였다. 형(여자배구대표팀 스테파노 라바리니 감독의 통역을 담당하는 안재웅 심판)과 함께 선수생활을 했지만, 일찍 유니폼을 벗었던 것도 마음을 움직였다.
안요한은 “이틀만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요청했다. “가슴이 뛰면 도전하라”는 아내의 말에 결국 선수복귀를 결심했다. 엄청난 노력으로 7주 만에 무려 17㎏을 줄이며 훈련에 매달렸지만, 하루아침에 만족스러운 결과가 나오진 않았다. 코치들의 평가는 부정적이었다.
그러나 장 감독은 안요한의 절박함을 봤다. “코트에서 열정적으로 한다. 저런 마음가짐이면 될 것”이라며 좀더 시간을 갖고 줬다. 일주일 후 모든 코치들은 안요한의 선수등록에 찬성했다. 아버지로서, 또 배구인의 아들로서 다시 한번 코트에서 뛰는 멋진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는 의지가 안요한을 일으켜 세웠다.
센터로서 데뷔전이었던 KOVO컵 첫 경기. 그는 국군체육부대를 상대로 무려 6개의 블로킹을 잡아내는 인생경기를 펼치며 강렬한 임팩트를 남겼다. 장 감독은 “큰 역할을 했다. 코트에서 열정과 절실함을 동료들에게 전파하는 선수”라고 칭찬했다. 경기 내내 러셀에게 중요한 내용을 전달하고 동료들의 분위기를 함께 느끼도록 해준 것도 좋았다. 그 덕에 러셀은 퇴출 위기에서 벗어나 MVP까지 수상했다.
통역에서 선수로 신분이 바뀌었지만 연봉이 크게 오른 것은 아니다. 이제 다시 선수생활을 시작하는 선수에게 많은 돈을 줄 상황도 아니다. 그 대신 구단은 코트에서 하는 만큼 보상해주기 위해 출전수당을 챙겨줬다. KOVO컵 우승 보너스도 챙겨줬다. 태어날 아이와 아내, 부모님, 형 등 안요한이 코트에서 더욱 열심히 해야 할 이유는 많다.
김종건 기자 marc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