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지석. 스포츠동아DB
V리그 최고의 별이다. 대한항공의 신흥 프랜차이즈 스타인 그는 데뷔 6년차에 커리어의 정점을 찍었다. 2018~2019시즌 팀의 정규리그 우승을 이끌며 베스트7 레프트 부문과 최우수선수(MVP)를 동시 석권했다. 해당 시즌을 마치고 맺은 첫 자유계약(FA)을 통해서는 5억8000만 원을 품으며 높은 가치를 확인했다. 남자국가대표팀에서도 주축 선수로 입지를 굳힌 그는 대한민국에서 내로라하는 레프트 공격수로 거듭났다.
이상했다. 늘 빛나는 수식어가 뒤따랐지만, 마음 한구석이 허전했다. 개인 첫 MVP 수상으로 느낀 성취감은 분명 강렬했다. 하지만 정지석이 꿈꿔왔던 리그 정상의 자리는 도착점이 아닌 새로운 출발점이 되어야 했다. ‘(곽)승석, (전)광인, (송)명근이 형을 따라잡고 싶다’는 생각으로 달려온 정지석으로선 막막했다. 이미 정규리그·챔피언결정전 우승까지 이뤄낸 그에겐 한 차원 높은 목표가 필요했다. “마음을 잡지 못했다”고 돌아본 그는 숙소에서 남몰래 눈물을 흘린 날도 많았다.
감당해야할 책임도 날로 무거워졌다. 정지석은 루키 시절부터 차세대 수비형 레프트로 각광받았다. 스스로도 올라운드 플레이어인 팀 선배 곽승석을 롤 모델로 꼽았고, 리시브를 비롯한 수비에 강한 자신감을 내비쳤다. 하지만 눈부신 성장과 함께 제2의 공격 옵션으로 급부상하면서 주위의 시선이 달라졌다. 일정 수준의 득점을 올리지 못하면 거센 비난과 마주해야했다. 토종 에이스에게 주어진 숙명이었다.
그는 “모두들 ‘정지석, 정지석’ 하니까 뭔가를 보여주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마음이 들었다”고 했다. 여기에 FA 계약 후 첫 시즌을 치르는 부담까지 가중됐다. 오직 팀 승리를 위해 뛰면서도 개인 성적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던 이유다. 정지석은 “공격에서 잘 풀리지 않으면 잘 할 수 있는 수비에서도 스트레스를 받았다”며 “멋모르고 배구를 할 때는 쿨하게 잘 잊곤 했는데, 이제는 생각해야할 것이 많아졌다”고 털어놨다.
혼자의 힘으로 극복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2020도쿄올림픽 아시아예선에서 빈손으로 돌아온 뒤 슬럼프에 빠졌을 때도 동료들이 손을 내밀어줬다. 박기원 감독은 물론 주장 한선수, 절친한 김규민까지 겉으로 힘든 내색을 하지 않으려는 정지석의 마음을 다독였다. 때마침 팀이 연승 가도를 밟았다. 부담을 덜어내고 경기력을 회복한 정지석은 차츰 본래의 활기찬 모습으로 돌아왔다.
“나를 위해주는 동료들의 마음이 정말 많이 느껴졌다”던 정지석도 자세를 고쳤다. “잘 안되더라도 재미있게 하자고 마음먹었다. 웃으니 저절로 즐거워지면서 경기도 잘 풀렸다”고 되짚은 그는 “실수를 하더라도 여유 있게 ‘하나 더 줘’하고 털어내면 팀에도 좋은 영향을 준다. 내가 웃으면 팀원들도 나를 보면서 안정을 찾을 수 있다”고 했다. 아울러 “생각하기 나름이지만 팀을 위해 뛰다보니 어느덧 9연승을 했다. 또 우승을 눈앞에 둔만큼 팀을 위해 뛰어야 마땅한 시기다. 앞으로도 팀을 위해 웃겠다”고 약속했다.
정지석(왼쪽). 스포츠동아DB
씩씩하게 데뷔 시즌을 치르는 신인 리베로 오은렬에게서도 기분 좋은 자극을 받았다. 정지석은 “고작 두 살 차이이긴 하지만 은렬이를 보면 정말 대견하고 예쁘다. 나는 프로에 처음 왔을 때 강 서브도 제대로 받질 못했다. 그런데 은렬이는 리시브에 대한 압박감이 큰 가운데서도 정말 잘 하고 있다. 자랑스럽다”고 미소 지었다. 이어 “은렬이를 보면 나도 투지가 많이 생긴다. 은렬이 덕을 많이 봤다”고 털어놨다.
배구에 대한 애정이 워낙 깊다. 평소 해외 배구 영상을 찾아보는 게 취미인 그는 인상적인 장면을 기억해뒀다가 팀 훈련 때 동료들과 함께 시도해보곤 한다. 어릴 때부터 자신의 경기 영상을 수차례 돌려보던 버릇이 자연스럽게 루틴으로 자리 잡기도 했다. 정지석이 한 자리에 정체되지 않는 배경이다. 여러 부침을 겪은 2019~2020시즌에도 국내 선수 공격성공률 1위(55.85%), 서브 1위(세트 당 0.387개), 리시브 2위(46.32%)를 차지하며 개인 커리어를 새롭게 써내려가고 있다.
정규리그가 재개될 날을 손꼽아 기다린다. 6라운드에 접어든 V리그는 최종 순위 경쟁이 한창이었다. 하지만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의 확산 여파로 3일부터 리그를 일시 중단했다.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현재 순위대로 정규리그를 종료할 수도 있다. 선두 우리카드(승점 69)를 승점 4 차이로 추격하며 통쾌한 역전 우승을 기약하는 대한항공(승점 65)에겐 최악의 시나리오다. 더욱이 리그 중단 직전까지 9연승으로 놀라운 상승세를 이어온 터였다.
“선수들 모두 리그가 꼭 재개되길 바라면서 컨디션을 관리하고 있다”는 정지석은 “투지가 사라질 수 있는 시기지만, 우리는 우승 하나만 보고 열심히 준비 중”이라고 밝혔다. 아울러 “무관중 경기를 치르면서 정말 힘들었다. 지켜봐주는 팬들이 있다는 것이 정말 힘이 되더라. 다시금 팬들의 소중함을 느꼈다”는 그는 “리그가 다시 시작되면 중단된 기간 동안의 스트레스를 풀어드릴 수 있도록 팬들을 위해 더 재미있고 박진감 넘치는 경기를 보여드리겠다. 물론 승리는 덤이다”라며 활짝 웃었다.
서다영 기자 seody3062@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