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톡톡바둑관전기]가장무거운판돈

입력 2008-09-17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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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좋았어.” 박정상이 <실전> 백1·3을 올려놓자 박영훈이 눈썹을 치켜 올리며 말했다. “이 두 수가 승착이었지.” 두 사람 모두 최선을 다해 둔 한 판이었다. 사실 두 사람은 C조에서 모두 2승을 올려 결선 진출이 확정된 상태이다. 따라서 이 바둑의 승부는 별 의미가 없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자신이 가진 기량을 올인하며 멋진 바둑을 두었다. 아무 것도 걸린 것이 없다면 승부사는 ‘자존심’을 건다. 어쩌면 자존심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판돈인지도 모른다. <실전> 흑6으로는 <해설1> 1이 눈에 들어온다. 중앙의 흑 집을 키우고 싶다. 하지만 보다시피 흑이 안 된다. 흑이 죽는 것이다. <실전> 백11까지 중앙이 초토화되어서는 백승이 확정되었다. 반면이 좁아져 더 이상 변화의 여지도 없다. ‘끝내기의 귀신’ 박영훈이라 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사실 <실전> 백1·3이 놓여지는 순간 박영훈도 패배를 직감했을 것이다. <실전> 흑10으로는 <해설2> 흑1로 끊어보고도 싶다. 이렇게 해서 백을 잡을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다. 그러나 이것은 수상전. 불행하게도 흑이 안 되는 수상전이다. 복기는 여기까지. 이후의 수순은 더 두어볼 필요가 없다. 그저 손이 가는 대로 마무리를 지었을 뿐이다. 두 사람 모두 얼굴이 땀으로 반지르르하다. 그래도 환한 표정이다. 아무 것도 걸리지 않았던 승부. 그러나 힘껏 운동을 하고난 뒤의 상쾌감이 밀려온다. “밥이나 먹으러 갈까?” 두 사람이 바둑판을 정리하고는 나란히 스튜디오를 나섰다. 이들이 떠난 빈 바둑판이 유달리 빛나 보였다. 승부의 여운이 안개처럼 깔려 있었다. 그것은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291수, 백3집반승> 양형모 기자 ranbi@donga.com 해설=김영삼 8단 1974yskim@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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