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피드스케이팅 이규혁.
모태범 “큰형님은 골드꺠메이커…고맙습니다”
출발을 알리는 총성이 울렸다. 이규혁(32·서울시청)이 이를 악물고 출발하는 모습이 경기장 내 중계화면에 고스란히 비쳤다. 18일(한국시간) 리치몬드 올림픽 오벌. 2010밴쿠버동계올림픽 스피드스케이팅 남자 1000m 17조 경기가 막 시작된 참이었다.이규혁은 엄청나게 속도를 냈다. 200m 지점을 16초39로 통과. 구간 1위였다. 600m 지점은 41초73이었다. 이번에도 역시 1위였다. ‘4전5기’의 실현이 마침내 눈앞으로 다가오는 듯 했다. 하지만 결승선을 넘는 순간, 전광판에는 1분09초92라는 기록이 찍혔다. 순위는 9위. 이규혁은 그대로 연습 주로에 드러누웠다. 그리고 몇 분 뒤, 까마득한 후배 모태범의 두 번째 올림픽 메달이 확정됐다.
●젖 먹던 힘까지 쏟았지만…조편성부터 불운
1994년 릴레함메르대회부터 시작된 동계올림픽 출전. 이번이 다섯 번째였다. 이미 이틀 전 500m에서 15위에 그쳤기에, 서른 둘 베테랑에게는 어쩌면 마지막 기회였다. 하지만 조편성부터 불운했다. 김관규 감독은 “대부분의 선수들이 인코스에서 타고 싶어 하는데, 아웃코스에 배정됐다. 600m까지는 스케이팅이 나무랄 데가 없었지만 마지막 코너를 아웃으로 돌아 나가다 보니 체력적인 부분에서 한계가 왔던 것 같다”고 했다.
체육과학연구원 윤성원 박사 역시 “선수들은 결승선 통과 후 40%의 스피드로 링크를 돌면서 동적회복을 한다. 하지만 이규혁이 곧바로 주저앉는 모습을 보고 동적회복이 힘들 정도로 있는 힘을 다 쏟아부었다는 걸 느꼈다”고 말했다.
게다가 이규혁이 내심 금메달을 노렸던 500m에서의 부진도 심리적 영향을 미쳤다. 500m 금메달리스트인 후배 모태범이 바로 앞 조에서 좋은 성적으로 1위에 오른 점도 이규혁 개인에게는 운이 좋았다고 할 수 없다.
●모두가 기억할 한국 빙상의 ‘큰 형님’
이규혁의 대표팀 후배 문준(28·성남시청)은 “올림픽 메달은 하늘이 주는 것 같다”며 아쉬워했다. 한국 빙속의 성장을 이끌어온 대표팀 터줏대감이지만, 후배들이 첫 올림픽에서 속속 메달을 목에 거는 모습을 지켜만 봐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규혁의 가치는 오히려 빙상인들이 더 잘 안다. 금메달의 영광을 누린 모태범과 이상화가 입을 모아 “이규혁 선배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다”며 고마워하고, 첫 빙속 메달리스트였던 김윤만이 “지금 우리가 누리는 영광은 이규혁이 있기에 가능했다”고 인정하는 이유다.
잠시 빙판 위에 누워 있던 이규혁은 다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링크를 돌고 있는 모태범에게 다가가 축하 인사를 건넸다. 비록 텅 빈 링크에 홀로 남아 눈물을 흘렸을지언정, 그는 마지막까지 후배에게 ‘큰 형님’으로 남았다.
밴쿠버(캐나다) | 배영은 기자 yeb@donga.com
사진 | 양회성 기자 yohan@donga.com
▲ 다시보기 = 이규혁의 아름다운 4전 5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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