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소리는 대뜸 “요즘 MBC 신입사원이 된 기분”이라고 했다. 연기를 시작하고 한 번도 정기적으로 매일 출·퇴근하듯 촬영하는 주말극 제작시스템을 경험하지 않았던 그녀는 요즘 모든게 낯설기만 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표정은 밝았고 편안했다. MBC 주말극 ‘내 인생의 황금기’(극본 이정선·연출 정세호) 여주인공 문소리를 밤샘촬영이 이어진 다음날 오후 만났다. 그녀는 피곤한 기색 대신 “모르면 모르는 대로 솔직히 대한다”며 “드라마에서는 나도 신인 연기자일 뿐”이라고 말했다. 지난 해 ‘태왕사신기’을 통해 스크린에서 브라운관에 진출한 문소리는 요즘 드라마의 맛을 제대로, 그리고 맛있게 느끼고 있다.
- 떠난 연인의 아이를 임신한 채 다른 남자와 결혼하는 ‘이황’은 50부작 주말극에서 보기 어려운 역할이다.
“시놉시스에 이황은 ‘타고난 매력의 소유자’라고 써 있었다. 가만히 있어도 매력적인 여자라는데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이 엄청난 인물이다. 상처가 있어도 거리낌 없이 새 사랑을 갈구한다. 요즘 세태와 맞지 않나? 한 가지 걸리는 점은 극 중 시부모에게 할 말을 다 해 은근히 우리 시어머니께 눈치가 보인다.”
- ‘태왕사신기’로 혹독한 TV 신고식을 치러 한동안 드라마는 망설일 줄 알았다.
“‘태왕사신기’는 어려운 숙제였다. 마음으로 끝내 받아들일 수 없는 상황이 몇 번 있었다. 다니던 절을 찾아가 108배까지 했다. 제작 시스템은 여느 드라마와 달랐지만 TV의 매력을 느낄 수 있어 만족한다. 그래서 오히려 지금은 편안하다. 요즘 주변에서 자꾸만 ‘밝아졌다’는 말을 듣는데 김종학 감독님이 어떻게 생각할지 걱정이다.(웃음)”
‘오아시스’, ‘바람난 가족’ 등의 영화를 통해 승승장구하던 문소리는 ‘태왕사신기’로 한때 캐릭터에 적역이냐는 논란에 휩싸였다. 예상 외의 안티 시청자도 생겼다. 그런데 문소리는 1년도 채 안돼 다시 TV로 돌아왔다.
- 용기가 있다고 해야 할까?
“모든 걸 늦게 이루는 편이다. 사춘기도 늦었고 데뷔도 여배우로 주목받은 시기도 늦었다. 당연히 드라마도 늦었다. 하지만 내게는 무명 시절이 단 하루도 없다. 오디션에 통과해 곧바로 데뷔작 영화 ‘박하사탕’ 촬영을 시작했다. 무명 시절이 없던 건 평생 콤플렉스지만 한편으론 겁이 없다. 모르니 도전할 수 있다. 다시 드라마를 택한 이유도 그런 힘 덕분이다.”
- 결혼 이후의 작품이 전작에 비해 편안하다. 영화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이나 이번 주말극은 대중과 친해지려는 노력 같다.
“사실 결혼은 포기상태였다(웃음). 배우로 평생 혼자 살 수 있다고 생각했다. 막상 결혼하니 생각한 것보다 훨씬 괜찮다. 매일 이벤트가 있는 건 아니다. 일상도 뻔하다. 그렇지만 하루 종일 웃게 되고 의논할 사람이 있어 든든하다. 덜 심심하다. 이런 따뜻한 마음이 출연작 선택에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까.”
- 배우와 아내, 며느리까지 세 가지 역할을 한다.
“시어머니 연세가 올해 여든이신데 처음에는 손에 물 한 방울 묻히지 못하게 했다(웃음). 막내 며느리라고 애지중지 여기신다. 남편(장준환 감독)과 부부이자 동료, 술친구다. 남편이 늘 대본연습을 거드는데 진한 애정 장면이 나오면 질투가 심하다. 지금도 ‘감독님’과 ‘소리 씨’라는 호칭으로 서로 존대를 한다. 물론 화가 나거나 급할 때는 각자의 고향인 전주와 부산 사투리를 거칠게 구사해 주변 사람이 놀라기도 하지만.”
가족 이야기를 풀어놓던 문소리는 8월 초 남편, 남동생 부부와 함께 보리암에서 보낸 1박 2일간의 여름휴가 후일담을 들려줬다. 남해의 절경을 자랑하는 보리암 등반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주차된 차 위에 공지영 작가의 산문집 ‘네가 어떤 삶을 살든 나는 너를 응원할 것이다’가 놓여있었다고 한다.
무심코 첫 장을 펼치자 급히 쓴 글씨체로 ‘문소리 씨가 어떤 모습이든 언제나 응원하겠다’는 이름 모를 팬의 메시지가 적혀있었다. 문소리는 눈물을 쏟으며 책을 읽었다고 했다.
“배우지만 때로는 정치적 목소리를 내는 제게 대중이 기대하는 바가 있는 것 같다. 배우에게는 세상의 고지식한 윤리와 관습이 불필요하지만 사실은 늘 그것에 매여 고민한다. 이제는 비겁하게 살지 않으면 사람들도 배우와 인간 사이에서 겪는 저의 갈등을 이해해줄 거란 믿음이 생겼다.”
문소리는 연말까지 ‘내 인생의 황금기’를 통해 실제 상황과도 같은 아내, 며느리, 딸로 시청자 곁에서 동고동락할 예정이다.
이해리기자 gofl1024@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