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스포츠 전문 주간지 <넘버>는 5월 ‘격투대국 재생계획’이란 커버 섹션을 내놓으며 추성훈(일본명: 아키야마 요시히로)을 표지 모델로 선정했다. PRIDE 해체 후 MMA(종합격투기) 시장의 주도권이 일본에서 미국의 UFC로 넘어간 현실을 직시한 이 잡지는 재반격의 선봉장으로 추성훈을 지목한 것이다.
현재 DREAM(드림)에 소속된 추성훈은 일본의 신성 아오키 신야, 센고쿠의 간판 고미 다카노리, 드림의 테크니션 에디 알바레스, 종합격투기의 선각자 사쿠라바 가즈시와 함께 <넘버>가 뽑은 ‘재생의 실행자’로 간택됐지만 이 가운데서도 첫째 파트를 장식했고, 표지 사진을 포함해 풀 사진만 4장이 들어가는 등 비중 있게 다뤄졌다.
이미 한국에서 ‘추성훈’으로서 섹스어필한 반항아적 이미지로 브랜드화(化)된 그이지만 일본에서 만들어진 ‘아키야마’의 상품 가치는 또 다른 이미지로서 구축되고 있다. 그리고 <넘버>는 그 이미지가 일본 종합격투기의 활로가 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했다.
○ 추성훈 혹은 아키야마=실력+스토리
아키야마든 추성훈이든 그는 강하다. <넘버>는 이런 그를 ‘타격유도가(打擊柔道家)’라 칭했다. 2002년 아시안게임 금메달을 딴 유도선수 출신이지만 2007년 히어로즈 대회 라이트 헤비급 결승전에서 데니스 강을 KO시킬 때의 주먹은 경악할 만한 스피드와 파괴력이었다.
K-1은 무도(武道)인 동시에 엔터테인먼트다. ‘싸움’에 의미를 부여하고, 시장을 키우기 위해 K-1이 중시하는 것이 선수의 스토리라인인데 추성훈의 인생역정은 이 욕구에 딱 부합한다.
재일교포 4세란 경계인 내셔널리티, 국가대표의 꿈을 품고 ‘추성훈’이 됐지만 끝내 뚫지 못했던 한국 유도계 파벌의 벽, 다시 ‘아키야마’로 돌아와 2002 년 부산 아시안게임에서 한국 선수를 꺾고 쟁취한 금메달, 그리고 2004년 아테네올림픽 대표 탈락 후 종합격투기 입문…. 이 과정에서 한국에서 배신자로 매도됐고, 일본에서 이방인으로 소외됐지만 “좋은 점도 나쁜 점도 있었지만 다양한 경험이 됐기에 지금은 고맙게 여긴다. 덕분에 매사를 일면적으로 보지 않게 됐다”라고 그는 말한다.
K-1 입문 뒤에도 추성훈의 격투인생은 두 차례의 무효 경기로 깊은 굴곡을 남겼다.
하나는 일본의 격투영웅 사쿠라바와의 대결 때 터진 크림사건이고, 또 하나는 미사키 가즈오와의 대결 중 당한 사커킥 반칙이었다.
추성훈은 2006년 다이너마이트 대회에서 파운딩 공격으로 사쿠라바에 KO 승을 거뒀지만 몸에 미끄러운 크림을 바르고 출장한 것이 발각돼 무기한 출장정지 징계를 받았다.
이후 2007년 10월 히어로즈 대회에서 재기했지만 일본 매스컴은 자기들의 영웅인 사쿠라바를 부당하게 이겼다는 이유로 ‘공공의 적’으로 낙인찍었다. 그리고 추성훈은 2007년 12월 31일 야렌노카 대회에서 미사키의 반칙 사커킥을 맞고 일본인들이 고대하던 바대로 쓰러졌다.
그러나 <넘버>가 적시했듯, 미사키전 이후 추성훈의 출장 여부에 드림의 흥행 성패가 좌우될 정도로 오히려 가치는 더 높아졌다. 일본인들은 그가 쓰러지는 것을 보고 싶어 하지만 추성훈은 그 기대를 저버리고 악착같이 이기는 길을 택했기 때문이다.
○ 안티 히어로가 일본 종합격투기를 구원할까
추성훈은 일본에서 ‘마왕’이란 악(惡)의 이미지로 통한다. 야유하지만 강하기에 경멸할 수는 없는 존재인 셈이다. <넘버>는 추성훈은 미사키전 ‘패배’로 행복 스토리를 쓸 수도 있었다. 추성훈이 패자의 드라마를 받아들인다면 관객과의 접점이 생길 수 있었다.
그러나 추성훈은 그런 스토리를 거부했다. 미사키의 사커킥이 반칙이라고 제소했고, 무효 판정을 받아냈다. 올바른 판정을 구하는 것은 당연한 자세지만 대다수 일본인은 추성훈이 자기들이 원하는 대로 패배를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쪽으로 해석했다고 언급했다.
이로써 ‘추성훈은 악역을 넘어 이해가 불가능한 이물(異物)이 됐다’라고 <넘버>는 정의했다. 조화(和)를 중시하는 일본인의 정서상, 이물은 배격돼 마땅한 ‘왕따’의 동의어나 다름없다. 그러나 추성훈은 위축되는 대신 “그것이 내 방식이니까 어쩔 수 없다”라고 말할 뿐이다.
실제 추성훈은 ‘크림사건’ 후에도 유도복 차림을 고수했고, “크림은 일상생활에서도 사용하는 것”이라고 언급, 후회나 반성의 낯빛은 비치지 않았다. “나에겐 나다운 것이 소중하다. 사건은 평생 짊어지고 가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그러나 그 사건에 끌려 다니고 싶지는 않다”고 했다.
또 일본 관중의 야유세례에 대해선 “‘굉장하네’란 생각은 들지만 나의 일은 경기다. 관중하고 싸우는 것은 아니니까 무섭지 않다. 또 예상하고 있던 일이 일어난 것이니 받아들일 뿐이다. 주변이 어떻게 (나를) 판단하든 나는 요구하지 않는다”고 답했다.
이렇듯 추성훈은 일본인이 중시하는 평판을 초탈했다. 일본 팬들은 추성훈이 과거 PRIDE의 반달레이 실바와 같은 ‘결국엔 (사쿠라바나 크로캅 같은 영웅에게) 패하는 악역’을 원할지 모르지만 추성훈은 일본인 전체를 적으로 돌리더라도 악착같이 이기는 쪽을 택한 셈이다.
이런 추성훈을 <넘버>는 ‘격투기계의 이의신청’이라 묘사했다. 역설적으로 추성훈이 기대를 저버리면 저버릴수록 그의 존재감은 더 커지게 됐다. 아울러 추성훈을 통해 드림은 몰락한 PRIDE와 차별화된 가치와 지향점을 그릴 수 있게 됐다.
김영준 기자 gatzb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