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빅토르 호블란(노르웨이)이 23일(현지 시간) 미 플로리다주 팜하버 이니스브룩 리조트 코퍼헤드 코스에서 열린 미국프로골프(PGA) 투어 발스파 챔피언십 정상에 올라 트로피를 들고 입 맞추고 있다. 호블란은 최종 합계 11언더파 273타로 우승, 1년 7개월 만에 투어 정상에 올랐다. 팜하버(미국) ㅣAP 뉴시스
PGA투어 발스파 챔피언십에서 빅토르 호블란(노르웨이)이 저스틴 토머스(미국)를 1타차로 따돌리고 우승을 차지했다.
저스틴 토머스는 2022년 5월 PGA챔피언십을 우승한 이후에 이렇다 할 성적을 내지 못했다. 2023년부터 플레이를 지켜본 골프 팬이라면 그가 5년 전 세계랭킹 1위였고, 3년 전 메이저 챔피언이었다는 사실에 놀랄 것이다.
빅토르 호블란은 2023년 8월에 페덱스컵을 들어 올렸다. 페덱스컵 상금만 1800만 달러(약 263억원)를 획득한 후로 그는 이렇다할 활약을 펼치지 못했다. 페덱스컵이 가져다 준 큰 돈이 그의 샷을 무디게 만든 것처럼 보였다.
그들이 올해 메이저 대회와 라이더컵에서 활약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자신감의 회복이다. 작은 규모의 대회라고 해도 트로피를 들어 올리는 것이 그들에게 중요하다. 기량과 명성을 가진 선수 중에도 PGA투어에서 트로피를 들어 올리지 못한 선수가 있다. 만일 1승만 한다면, 여러 차례 승수를 쌓을 수 있을 것 같은 선수가 있다.

안병훈(오른쪽)이 20일(현지 시간) 미 플로리다주 팜하버 이니스브룩 리조트 코퍼헤드 코스에서 열린 미국프로골프(PGA) 투어 발스파 챔피언십 첫날 9번 그린에서 니코 에차바리아(콜롬비아)와 대화하고 있다. 안병훈은 첫날 1언더파 70타를 적어냈다. 팜하버(미국) ㅣ AP 뉴시스
안병훈은 3라운드 11번 홀까지 9언더파로 선두를 달리고 있었다. 호블란의 우승 스코어가 11언더파임을 고려하면 그의 중간 성적이 얼마나 좋았는지 짐작할 수 있다. 안병훈의 PGA투어 첫 승리가 기대됐고, 2023년 10월 김주형이 우승한 이후 1년 5개월 동안 없었던 한국 선수의 승리가 가시권이었다. 지난해 송도 잭니클라우스 골프클럽에서 개최된 DP월드투어 BMW챔피언십에서 우승하고 할머니를 끌어안고 울던 안병훈의 모습이 재현될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는 12번 홀에서 18번 홀까지 7개 홀에서 5개의 보기를 쏟아 내며 리더보드 상단에서 밀려났다. 팬들의 실망감도 있지만, 안병훈 자신의 좌절감이 더욱 컸을 것이다. 간혹 이러한 시련이 긴 슬럼프로 이어지기도 하는데, 그리되지 않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망각의 기술이다.
골프에서 망각의 중요성은 잭 니클라우스가 자주 강조한 것이며, 골프 멘탈 코칭의 권위자인 밥 로텔라가 쓴 책 ‘골프는 완벽함으로 구성되는 게임이 아니다’의 주요 주제 중 하나다.
망각의 중요성은 골프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다. 프리드리히 니체는 ‘역사의 유익과 해악에 대하여’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인간은 역사적이어야 하지만, 지나치게 역사적이어서는 안 된다”. 인간이 과거를 돌아보며 성찰하고 문명을 이루는 것은 역사의식 때문이다. 그러나 역사성이 지나치면 생명력이 파괴된다. 과거에 집착하면 현재를 살 수 없고, 계속되는 회고와 반성은 행동을 막아선다. 그래서 니체는 존재는 비역사성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다고 강조했다.
역사성은 우리가 어디서 왔는지,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나침반이다. 비역사성은 나침반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걸어갈 수 있게 만드는 두 발이다. 나침반만 보고 있으면 한 발짝도 못 움직이고, 두 발만 움직이면 방향을 잃고 헤맨다.
골프에서 두 발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안병훈을 비롯한 모든 골퍼에게 망각은 중요하다. 안병훈이 두 발로 굳건히 서고 걷는다면 그의 PGA투어 우승은 시간문제다.
의외로 최고의 선수 중에 PGA투어에서 우승하지 못한 선수가 있다. 콜린 몽고메리(스코틀랜드)는 프로대회에서 57번이나 우승했고, 8번이나 유러피언 투어 상금왕에 올랐다. 2005년 디오픈에서는 42세의 나이에 타이거 우즈와 경쟁하며 2위에 올랐고, 라이더컵에서 누구보다 많은 점수를 얻었다. 그는 세계 골프랭킹에서 2위까지 올랐고, 탑 10에 400주 이상 머물렀지만, PGA투어 우승과는 거리가 멀었다.

2024 파리올림픽 골프 영국 대표 토미 플릿우드가 지난 8월 4일(현지시간) 프랑스 생캉탱앙이블린 골프 나시오날에서 열린 남자 스트로크 플레이 4라운드 1번홀에서 티샷을 하고 있다. 스포츠동아 DB
현역 유명 선수 중에 PGA투어를 우승하지 못한 선수로 토미 플릿우드(잉글랜드)가 대표적이다. 그는 앨버트로스를 기록했고, 59타를 치기도 했지만, 불명예스럽게도 PGA투어에서만 2500만 달러 이상의 상금을 벌고도 우승하지 못한 유일한 선수가 됐다.
그럼에도 그는 골프 팬과 골프 미디어로부터 높은 인기를 구가하고 있다. 그는 모든 선수가 부러워할 만한 아름다운 스윙을 가지고 있고, 멋진 의상 및 헤어스타일을 보여 주며, 항상 웃는 얼굴로 팬과 미디어를 맞이한다. 그것이 많은 골프용품 회사가 그의 상품성을 높이 사는 이유다.
골프는 우승을 위해 비역사성, 즉 망각이 필요하지만, 골프는 우승 없이도 충분히 아름다운 게임이다. 안병훈이 그것을 깨닫는다면, 우승은 그렇게 멀리 있지 않을 것이며, 우승하지 못한들 아무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윤영호 골프 칼럼니스트
윤영호 ㅣ 서울대 외교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증권·보험·자산운용사에서 펀드매니저로 일했다. 2018년부터 런던에 살면서 글을 쓰고 있다. 저서로 ‘옵션투자바이블’ ‘유라시아 골든 허브’ ‘그러니까 영국’ ‘우리는 침묵할 수 없다’ ‘골프: 골프의 성지에서 깨달은 삶의 교훈’ 등이 있다. 런던골프클럽의 멤버이며, ‘주간조선’ 등에 골프 칼럼을 연재했다.
연제호 기자 sol@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