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표·골수·열혈 여성팬’미스 베이스볼 8명이 스포츠동아에 집결했다. 여성팬들은 ‘국민감독’ 김인식 KBO 기술위원장과 함께 발랄하지만 내공이 담겨 있는 야구 수다를 2차까지 자리를 옮겨 진행했다.뒷줄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KIA팬 김은경, LG팬 송주현, 삼성팬 김빛나, 한화팬 구율화, SK팬 박다해, 넥센팬 황선하, 두산팬 최선경, 김인식 위원장, 롯데팬 박현수 씨.
8개 구단 대표 여성팬 “내가 야구에 빠진 이유”
《누가 야구를 남성들의 전유물이라 했던가. 최근 몇년 사이 야구장의 풍경이 달라졌다.
베이징올림픽 금메달 이후 급격하게 늘어난 전국의 여성팬들이 야구장으로 몰려들어서다.
관중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 것은 물론 야구용품 판매도 부쩍 늘었다.
이들이 없었다면 프로야구 흥행 돌풍은 불가능했을 터.
그래서 스포츠동아가 8개 구단 여성팬 여덟 명을 직접 만났다.
앞으로 10회에 걸쳐 8인8색의 생생한 ‘야구 이야기’를 연재한다.》곱디 고운 처자 여덟 명이 새침하게 앉아있다. 모두가 일면식도 없는 사이. 그런데 야구의 ‘o’자가 나오기 무섭게 눈이 반짝반짝 빛난다. 마치 10년지기들이 오랜만에 만나기라도 한 것처럼, 꾹 다물었던 입을 열고 신나게 야구 수다를 풀어놓는다. 응원하는 팀도 다르고 나이와 직업도 제각각이지만, 뜻은 결국 하나로 모아진다. “야구 없이는 못 살아!” 12월의 어느 날, 남자친구보다 야구가 더 좋다는 프로야구 8개 구단 열혈 여성팬들이 서울 광화문 스포츠동아 스튜디오에 모였다. 갈수록 늘어가는 여성 야구팬들의 열정을 대변해달라고, 스포츠동아가 직접 초청한 ‘대표’들이다. 일단은 그녀들이 누구인지, 그리고 어떻게 야구와 만나 왜 사랑하게 됐는지 들어볼 필요가 있다. 첫 회는 말 그대로 ‘자기 소개’다.
버스 두번 갈아타고 남양주서 문학구장 통근
○SK팬 박다해(22)=신문방송학을 전공하는 대학생. 인천에 살던 어린 시절, 사촌 오빠들의 손에 이끌려 도원구장에 놀러간 게 야구와의 첫 만남. 그 때의 기억은 ‘한참 자고 일어났는데도 아직 안 끝났네’ 정도. 하지만 김성근 감독이 SK에 부임한 2007년, 야구가 뭔지 알게 되면서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이후 인천과 서울을 오가는 열혈팬 인생 시작. 심지어 학교에서 ‘민주주의’ 과목 리포트 주제로 ‘SK 야구’를 채택해 A학점을 받기도 했다. 그녀의 하루는 야구 기사 체크로 시작해 야구 결과 확인으로 끝난다.
“저는 김성근 감독님이 야구를 떠나 인생에서도 배울 점이 많으신 분이라고 생각해요. 20대 초반인 저도 나태하고 게을러질 때가 있는데, 끊임없이 자신을 채찍질하시는 감독님을 보면서 제 삶을 반성하죠. 무엇보다 SK 스타일의 야구가 저에게 잘 맞는 것 같아요. 늦게 배운 도둑질이 더 무섭다고 하죠? 작년에 한 학기 휴학을 했는데, 집이 있는 남양주에서 인천까지 버스를 두 번씩 갈아타고 문학구장에 다녔어요. 어떤 날은 버스에 있는 시간이 더 길더라고요. 작년까지는 친구들이 ‘넌 어떻게 입만 열면 야구 얘기냐’고 핀잔을 했는데, 올해는 ‘야구장 한 번만 데려가줘’라고 졸라요. 높아진 인기를 실감하고 있어요.”
엄마 뱃속에서 야구장 나들이 ‘모태 삼성팬’
○삼성팬 김빛나(26)=그녀를 설명하는 네 글자, ‘모태 삼성’. 김 씨와 삼성의 인연은 프로야구 원년인 1982년까지 흘러가야 한다. 삼성 골수팬이었던 김 씨의 부모가 맞선 자리에서 처음 만난 해라서다. 어색한 대화를 나누던 남녀는 서로 야구팬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자 기다렸다는 듯 야구장으로 향했다. 그리고 4년 후 부모만큼이나 야구에 죽고 못 사는 외동딸이 탄생했다. 엄마 뱃속에서 야구를 배웠고, 생후 70일 만에 야구장을 찾았다는 빛나 씨. 지금은 세계태권도연맹에서 태권도를 올림픽 정식 종목에 잔류시키기 위해 불철주야 힘쓰고 있다.
“태어난지 70일 된 저를 데리고 야구장에 가신 것만으로도 대단하잖아요. 그런데 저희 부모님, 제가 시끄럽다고 막 우니까 제 귀에 솜을 끼워놓고 달래면서 야구를 끝까지 보셨대요. 그러니 제가 어떻게 삼성팬이 되지 않을 수 있겠어요? 운명이죠. 어릴 때부터 온 가족이 장효조 선수를 정말 좋아했어요. 지금도 가끔 부모님과 함께 대구구장에 응원 원정을 떠나기도 해요. 집에서 TV로 야구를 볼 때도 유니폼을 입고 본다면 믿으시겠어요? 전 야구, 그리고 삼성이 모태신앙이에요.”
여성 야구팬들은 야구장에 홀로 오지 않는다. 그리고 여성 야구팬들은 야구장에 오면 ‘표현’을 한다. 여성 야구팬들은 승패를 떠나 야구를 즐길 줄 안다. [스포츠동아 DB]
베이징올림픽 전승 우승 지켜보다 야구에 푹
○두산팬 최선경(21)=고교생이라 해도 믿을 만큼 앳된 얼굴의 대학생. 어린 시절에는 야구장 마스코트를 귀여워한 게 전부였지만, 2008베이징올림픽 야구대표팀이 전승으로 금메달을 따는 장면을 지켜보다 야구에 푹 빠졌다. 그리고 정신을 차려보니, 두산팬이 돼 있었다. 늘 넘어지고 구르고 부딪히는 두산의 ‘허슬 플레이’를 마음 깊이 사랑한다. 올해 준플레이오프에서도 롯데에 2패 후 3연승하는 끈기를 보며 다시 한 번 감동. 하지만 “예전에 SK에 반대로 (리버스 스윕)당했을 때를 생각하니, 롯데팬들에게 정말 미안하다”고 말할 만큼 심성이 곱다.
“다들 좋아하는 구단은 달라도, 한국 사람이라면 국가대표를 한 마음으로 응원하잖아요. 저도 올림픽 때 그랬어요. 일본전 기억 나시죠? 두산의 김현수 선수가 대타로 나와서 극적인 안타를 치던 모습. 게다가 그 몸집 큰 선수가 도루까지 하리라고 누가 상상했겠어요. 그런 게 두산의 상징이자 매력인 것 같아요. 늘 최선을 다하잖아요. 이번 플레이오프 때, 모자에 ‘허리야 버텨줘’라고 써넣고 최고의 호투를 펼친 임태훈 선수 좀 보세요. 그럴 때마다 ‘역시 우리 두산이야’ 싶었어요.”
대전토박이, 롯데팬 열정에 반해 ‘갈매기 변신’
○롯데팬 박현수(23)=사진 촬영 때 표정과 포즈가 남다르다 했더니, 연극영화과 출신이다. 연기와 리포터 일을 병행하는 중. 대학 시절 국제영화제를 보러 매년 부산을 찾았는데, 사람들에게 ‘뭐가 가장 유명하냐’고 물을 때마다 똑같은 대답을 하더란다. “부산하면 야구 아니겠나. 우리는 야구 없이 몬 산다.” 그래서 호기심에 롯데 경기를 보러 갔고, 단번에 중독됐다. 대전에서 나고 자란 토박이지만, 롯데의 연고지 부산을 고향 다음으로 좋아한다.
“저보다 훨씬 더 롯데를 오래 좋아하고 사랑하신 분들이 많은데, 제가 나서서 쑥스럽고 죄송해요. 어릴 때 부모님을 따라서 빙그레 응원도 해봤지만, 롯데를 알고 나니 나랑 맞는 구단은 따로 있는 것 같더라고요. 처음 잠실 구장에 갔을 때가 생각나요. 주황색 봉지를 머리에 쓰고 신문지를 사정없이 흔드는 모습! ‘마!’라는 한마디에 그 넓은 경기장의 사람들이 단번에 집중하면서 마운드에 있는 투수를 움찔하게 만들잖아요. 한 번 다녀온 후에는 응원곡이 머리에서 계속 맴돌 정도로 굉장한 충격으로 다가왔어요.”
가슴에 꽂힌 최희섭 홈런…자연스레 KIA팬으로
○KIA팬 김은경(31)=액세서리·인테리어 쇼핑몰 ‘코디몰’의 운영자. 2006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미국전을 지켜보던 중, 대타로 나와 쐐기 3점포를 쏘아올린 최희섭의 홈런볼이 마음에 콕 박혔다. 가장 좋아했던 홍성흔(롯데·당시 두산)이 뒤로 밀리는 순간. 그리고 최희섭의 국내 복귀와 함께 KIA팬이 됐다. 2010년은 시즌 133경기 중 123경기를 챙겨봤을 정도로 KIA와 함께 호흡한 한 해였다.
“야구를 전혀 몰랐어요. 하지만 대표팀이니까 ‘한국 이겨라!’ 하면서 응원하다가 듬직한 최희섭 선수가 눈에 들어오더군요. 지금은 KIA 선수들이 다 좋아요. 수도권 선수들도 KIA에만 오면 다 순박해지는 것 같지 않아요? 지난해까지는 혼자서 중계를 보며 좋아하는 수준이었지만, 올해 KIA 팬카페에 가입하면서 주말에 회원들과 삼삼오오 모여 야구장에 갈 정도로 열성팬이 됐어요. 요즘은 엄마도 딸이 KIA를 좋아하는 걸 알고 야구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셨어요. 집에 가면 ‘KIA가 또 졌다’고 알려주실 정도로요.”
LG 역전쇼 꿈꾸며 올해만 잠실구장 60번 찾아
○LG팬 송주현(28)=잠실에 산다. 그래서 집에 갈 때마다 야구장 앞을 지났다. 밤에 환하게 불이 켜지고 뜨거운 함성 소리가 들리는데, 그렇게 신이 날 수가 없었다. 중학교 때 친구들을 졸라 처음 가봤지만, 깡소주 던지고 욕하는 아저씨들이 무서워서 곧바로 귀가. 결국 대학 때 남자친구와 함께 간 야구장에서 LG의 매력에 푹 빠졌다. 그리고 현재 ‘8년째 4강에도 못 올라가는 팀’이 ‘9회말 2아웃에서도 언제든 역전할 수 있다는 이상한 믿음’을 가진 채 계속 LG팬 생활을 하고 있다.
“LG 팬들은 그런 게 있어요. 뒤지고 있어도 우리가 역전할 것 같은, 알 수 없는 자신감. 9회말에 끝까지 ‘따라가기도’ 하는 LG 야구에 빠져들면, SK 부러울 게 없어요. 그러다 한 번 극적으로 이기기라도 하면 한국시리즈 우승 때보다 더 기뻐요. 1998방콕아시안게임에서 박찬호 선수의 마지막 공을 잡은 게 LG 조인성 포수였죠. 마운드에 뛰어올라가서 투수를 끌어안고 환호하는 모습이 너무 멋졌어요. 사실 작년에 조인성-심수창 배터리의 다툼 이후로는 마음이 아파서 야구를 안 봤어요. 그런데 이번 시즌 초에 또 3위까지 올라가면서 희망을 주더라고요. 올해는 연간권도 안 끊었는데 잠실 경기만 60번을 갔어요. PS 때요? LG 유니폼 입고 잠실 가서 롯데 응원했죠.”
이제 야구장에서 젊은 여성팬들은 주류다. 1990년대 중반 프로야구의 1차 전성기가 정치적, 지역적 색채를 띤 아저씨들의 한풀이 공간이었다면 2000년대 후반 프로야구의 르네상스는 젊은 여성들이 주도하는 탈이념적이자 개인적인 놀이 공간으로서 의미를 갖는다. [스포츠동아 DB]
야구 보면 살아있는 느낌…오랜 우울증도 훌훌
○넥센팬 황선하(25)=넥센 히어로즈를 좋아하는 그녀는 게임회사 ‘넥슨’에서 ‘영웅전’을 기획한다. 우연치고는 절묘하다. 깊은 우울증에 빠져 있던 시기에 야구를 보면서 ‘살아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야구 덕분에 웃음을 되찾은 셈. 사실 처음에는 롯데팬이었다. 하지만 롯데 장원준이 데뷔 첫 완봉승을 하던 2008년 7월의 어느 날, 9이닝 1실점으로 완투패하는 마일영(한화·당시 넥센)의 ‘아름다운 뒷모습’에 마음을 빼앗겼다. 요즘 그녀는 야구와 목하 열애 중이다.
“대전에서 대학 다니던 2007년에 롯데팬인 친구가 야구를 보러 왔어요. 그 날 롯데가 한화 구대성 선수를 무너뜨리고 이겼는데, 그게 그 해 가장 재미있는 경기라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한 번은 롯데를 응원하러 갔다가, 마일영 선수가 솔로홈런 딱 하나 때문에 패전투수가 되는 걸 보고 팬이 됐어요. 넥센은 선수들이 참 가족같이 정답게 뭉쳐있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사실 올해 초에 마 선수가 트레이드 돼서 실망감에 야구를 끊으려고 했죠. 친구가 고원준이라는 선수를 추천해서 한 번 봤는데, 그게 바로 8회 1사까지 노히트였던 ‘안개 낀 문학 경기’였어요. 그렇게 다시 돌아왔어요.”
한화 첫 우승이 준 자신감으로 사법고시 합격
○ 한화팬 구율화(34)=시작은 정민철이었다. 지금은 류현진이다. 그녀 마음 속의 에이스 말이다. 중학생이던 1991년, 한국시리즈 3차전에서 ‘회장님’ 송진우의 퍼펙트게임이 8회 2사 후 볼판정 하나로 날아가는 장면을 지켜보면서 일찌감치 인생의 쓴맛을 깨달았다. 또 1999년 한화의 창단 첫 우승을 목도한 후 사법고시 합격의 자신감을 얻었다. 변호사로 지금은 언론중재위원회 법무상담팀장으로 일하고 있다. 부모님, 여동생, 제부, 조카까지 3대가 모두 한화팬으로 구성된 ‘이글스 가족’ 출신.
“우리 집에는 종교가 세 개예요. 기독교, 천주교, 불교. 그런데 좋아하는 야구팀은 딱 하나, 오직 한화죠. 어린 조카는 ‘류현진’ ‘독수리’ ‘안타’ 같은 낱말 카드를 보면서 한글을 익혔을 정도죠. 2005년 준플레이오프 때, 시리즈 MVP가 된 최영필 선수가 ‘김인식 감독님이 믿고 내보내 주셔서 그 믿음에 보답하기 위해 던졌다’는 인터뷰를 했어요. 집에서 그 장면을 보신 어머니가 저에게 전화를 하셨어요. ‘내가 자식을 키우면서 가장 중요한 게 뭔가 했는데, 이제야 믿음이라는 걸 알겠다’고요. 다시 태어나도 한화팬으로 살 거예요.”
정리|배영은 기자 yeb@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사진|임진환 기자 photolim@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스포츠동아 D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