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건의 Let’s Go Baseball] 눈치 빠른 2루주자의 곁눈질은 정당방위인가

입력 2012-09-01 07: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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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G 오지환(왼쪽 끝)이 8월 11일 대구 삼성전 도중 상대 2루주자의 사인 훔치기 의혹을 제기하며 심판진에게 항의하고 있다. 스포츠동아DB

사인 훔치기와 정정당당 야구의 기준

박재홍 2루 사인 훔치기 논란…KS 날릴 뻔


김재박감독 “눈치껏 잘 알아내는 것도 기술”
도루·트릭 플레이 비교 기준 설명하기 애매

배터리 사인 훔치기는 명백한 반칙행위 규정
김응룡감독, 국제대회선 기존 사인도 변화줘


2000년 두산-현대의 한국시리즈. 당시 최강 전력을 자랑하던 현대가 연승을 먼저 거둔 뒤였다. 현대 박재홍이 2루서 사인을 훔쳤다는 의혹이 갑자기 이슈가 됐다. 진실은 그라운드에 있던 당사자만이 알 뿐. 양쪽의 목소리만 메아리쳤다. 두산 선수들은 3차전 후 즉석 미팅을 통해 전의를 불태웠다. 투수 박명환은 “(박재홍이) 타석에 나오면 머리를 맞혀버리겠다”며 흥분했다. 박재홍은 이를 보도한 기자에게 다음날 강력히 항의했다. 3차전까지 MVP(최우수선수) 페이스였던 박재홍은 그 여파 때문인지 4차전부터 타격 슬럼프에 빠졌다. 눈에 띄게 홈플레이트에서 떨어져 배트를 휘둘렀다. 두산은 이후 3연승했다. 현대 김재박 감독의 표정도 5차전부터 조금씩 어두워졌다. 현대는 최종 7차전에서 외국인선수 톰 퀸란의 2홈런 6타점 대활약을 앞세워 간신히 우승했다. 방망이보다 수비에서 좋은 모습을 보였던 퀸란은 1·4·7차전에 선발 등판한 조계현을 녹아웃(KO)시키고 MVP를 차지했다. 시리즈가 끝난 한참 뒤 김 감독을 만났다. 호기심이 발동해 당시의 사인 훔치기에 대해 물어봤다. 그는 훔치기 여부는 명확하게 말하지 않았지만 이런 말을 했다. “야구에서 상대의 사인을 눈치껏 잘 알아내는 것도 기술이다. 정정당당만을 말하면 도루나 트릭 플레이는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속임수와 정정당당의 기준이 애매한 야구

야구는 상대를 속이는 경기다. 투수는 타자를 속이고, 주자는 상대 수비의 빈틈을 파고들어 베이스를 훔친다. 이러다보니 센스 넘치는 야구와 정정당당하지 않은 야구의 기준이 애매모호해진다. 야구에도 ‘애정남’이 있다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기에 메이저리그의 불문율을 판단기준으로 들어본다.

우선 반칙행위. 타석에서 배터리의 사인을 훔치는 경우다. 어지간해선 드러나지 않는다. VTR로 상대 타자를 분석하다 타자의 눈동자 위치를 보고 찾아낸다. 다음 경기에 무조건 보복이다. 아무 이유가 없어도 빈볼이 날아간다.

2루에서 사인 훔치기. 상대가 눈치 채지 못하게 세련되게 하면 문제없다. 엉성해서 들키는 것이 문제다. 보복은 그래서 한다. 좀더 세련되게 하라는 얘기다. 주자가 2루에 있으면 투수가 간단한 손가락 사인을 포수에게 보내 사인 훔치기를 예방할 수 있다.

어느 팀 2루 주자의 해프닝 하나. 상대의 사인을 훔쳤다. 가운데 포크볼이었다. 몸쪽 코스이면 왼쪽 허벅지, 반대는 오른쪽 허벅지를 만져 타자에게 사인을 주기로 약속했다. 가운데? 그는 잠시 고민하더니 진지한 표정으로 자신의 그 부분을 어루만졌다. 이유를 아는 사람들은 배꼽을 잡고 웃었다.

김응룡 감독이 태극마크를 달고 국제대회에 나갔을 때의 에피소드다. 상대팀의 전력분석을 유달리 잘하는 일본은 예선 때부터 라이벌 한국의 사인을 분석했다. 김 감독은 예선 때 일부러 리틀야구와 같은 간단한 사인만 냈다. ‘코를 만지면 번트, 귀를 잡으면 히트앤드런’, 이런 식이었다. 일본 분석팀은 속으로 만세를 불렀지만 김응룡의 능청스러움을 몰랐다. 맞대결 때는 전혀 다른 사인으로 일본에 혼란을 줬다. 무궁무진한 수였다.

농구에서 시선과 반대방향으로 패스하는 것은 흔한 장면이다. 배구의 시간차 공격도 마찬가지다. 구기종목 중 유일하게 정적이면서 동적인 야구는 ‘속고 속이는’ 머리싸움이 더 치열하다. 그 중에서 사인 훔치기는 센스 넘치는 야구와 정정당당하지 않은 야구의 경계에 있다. 스포츠동아DB




○사인 훔치기보다 더 정교해야 하는 습관 알아내기

포스트시즌이나 큰 경기에 가면 등장하는 단어가 있다. 바로 ‘쿠세’다. 일본어로 ‘습관’이란 뜻이다. 특히 투수의 피칭 습관을 알아내는 것은 포스트시즌서 정보분석팀의 가장 중요한 업무 중 하나다.

1986년∼1989년, 4년 연속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한 해태가 1990년 삼성과의 플레이오프에서 패한 이유 가운데 하나가 믿었던 선동열이 KO 당해서다. 김용철, 김용국 등에게 홈런을 맞고 체면을 구겼다. 삼성 전력분석팀은 선동열이 슬라이더와 직구를 던질 때 글러브의 위치가 다르다는 것을 알아냈다. 시즌 초반 잘나가던 외국인투수들이 우리 타자들에게 나중에 혼나는 이유도 습관을 찾아내 공략하는 세밀한 야구를 견뎌내지 못해서다.

프로야구 초창기 재일동포 투수 김기태(청보∼삼성)가 있었다. 손이 땅에 닿을 듯이 던지던 전설적인 잠수함 투수였다. 일본프로야구 100승 투수였던 그에게도 약점이 있었다. 바로 눈이었다.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시력이 떨어져 밤에는 포수의 손가락 사인을 구분하지 못할 정도였다. 결국 포수가 적당히 양쪽 무릎을 어루만지는 것으로 사인을 대신했다. 처음에는 이를 알아채지 못했지만 세상에는 비밀이 없었다. 결국 김기태는 한국에서 이름값을 제대로 해내지 못한 채 조용히 떠났다.

전문기자 marco@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트위터 @kimjongke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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