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평선너머의꿈-이어도를보았던남자김영갑사진전

입력 2009-05-24 15:29:25
카카오톡 공유하기
프린트
공유하기 닫기

김영갑은 평생 제주도의 풍경만을 셔터에 담았다. 불치병으로 더 이상 셔터를 누르지 못 하게 되자 그는 눈과 마음으로 사진을 찍었다. 전시회의 미발표작들은 김영갑이 두고 간 영혼의 흔적들이다. 사진제공|충무갤러리

“흙으로 돌아갈 줄을 아는 생명은 자기 몫의 삶에 열심이다. 만 가지 생명이 씨줄로 날줄로 어우러진 세상은 참으로 아름답다. 천국보다 아름다운 세상에 살면서도 사람들은 또 다른 이어도를 꿈꾸며 살아갈 것이다.” (김영갑)

사진작가 김영갑은 1985년 제주도에 정착해 2005년 루게릭병으로 사망하기까지 20년 간 제주도에서, 오직 제주도만을 찍다가 간 사람이다.

48세의 나이로 눈을 감기까지 그는 늘 혼자였다.

결혼을 하지 않았으니 그의 연인은 카메라뿐이었다. 그는 카메라를 들고 제주도를 담았다. 제주도 사람들도 모르는 제주도의 모습이었다.

시시각각 황홀하게 피어오르는 구름, 원시적 안개 속에 잠긴 오름, 새벽녘 들판에 오롯이 선 나무 한 그루, 거친 바람에 몸을 뒤채는 억새, 분노하는 바다.
김영갑은 스스로 ‘삽시간의 황홀’이라 표현했던 순간들을 셔터 속에 잡아넣기 위해 하루도 빠짐없이 제주도의 산과 들, 바다를 찾았다.

그래서 그는 가난했다. 쌀이 떨어지면 라면을 먹었고, 라면마저 떨어지면 당근과 고구마로 허기를 채웠다. 얼마 되지도 않는 수익은 모두 필름값으로 들어갔다.

제주도 사람들은 그를 보고 안쓰러워했다. 돈도 되지 않는 사진을, 그것도 밥을 굶어가며 찍는 그를 한 마디로 정의해 버렸다. 김영갑은 미쳤다.

제주도에서 ‘미친’ 지 14년. 그는 더 이상 셔터를 누르지 못 하는 자신을 발견했다. 인간으로선 견디지 못 할 무서운 통증이 찾아왔다. 하루 종일 들과 산을 쏘다니는 자신을 향해 의사는 ‘운동부족’이라는 말을 했다.

뒤늦게 고통의 원인이 밝혀졌다. 10만 명 중 1, 2명에게 발병한다는 루게릭병이었다. 근육이 녹아 나중에는 수저조차 들 수 없게 됐다.

사진작가 김영갑


그가 아프다는 소리를 듣고 지인들이 제주도로 몰려왔다. 그들은 온갖 진수성찬을 차려놓고 그를 초대했다. 그러나 그는 그 음식들을 먹을 수 없었다. 국에 밥을 말아 한 숟갈씩, 닭이 물을 먹듯 머리를 쳐들고 밀어 넣는 그를 보며 사람들은 울었다.

하지만 그는 울지 않았다. 울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더 이상 셔터를 누를 수 없게 된 김영갑은 필름이 아닌 눈으로 제주도를 담았고, 이를 마음판에 인화했다. 그리고 자신의 작품들을 영원히 잊지 않아 줄 갤러리를 지었다. 더 이상 뼈 위에 남기를 거부하는 근육을 쥐어짜, 그는 매일 공사 현장을 지켰다.

2002년 여름. 마침내 폐교된 초등학교를 개조한 ‘김영갑 갤러리 두모악’이 지어졌다. 그리고 3년 뒤 김영갑은 그토록 소망했던 두모악 갤러리에서 마지막 육체의 끈을 놓았고, 그의 한 줌 뼈는 갤러리 마당에 뿌려졌다.

김영갑의 첫 서울 전시회(부제: 지평선 너머의 꿈)가 중구 흥인동 충무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다. 5월 14일부터 7월 19일까지로, 작고 후 서울에서 갖는 첫 번째 개인전이다.
그가 가장 사랑했고, 직접 살기도 했던 제주도 중산간지대(해발고도 200~500m)의 풍경을 파노라마 카메라로 담은 미발표작이다.

14일 개막식에는 탤런트 고두심 씨, 시인 이생진 씨 등 고인을 사랑했던 문화계 지인들이 참석해 전시회의 개막을 축하하고, 고인을 회고했다. 제주도가 고향인 고두심 씨는 “내 고향 제주도를 나보다 더 사랑하신 분”이라며 “지금도 ‘두모악’이란 이름만 들어도 온 몸이 떨린다”고 했다.

전시회장에 걸린 그의 사진들을 보았다. 낮은 지평선, 드넓은 하늘. 그 텅 빈 공간에 그는 무엇을 담고 싶었을까.

그는 손가락을 들어 제주도를 가리킬 뿐이다. 그리고 눈빛으로 말한다. 나는 침묵할 테니, 당신이 말하세요 … 라고.

양형모 기자 ranbi@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뉴스스탠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