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의 꿈이자 생업인 야구를 그만둬야 했다. 팀에서 밀려나 자리를 찾지 못하기도 했다. 그러나 NC 김경문 감독은 그들에게 다시 
한번 뛰자고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절대 배신하지 않는 노력을 믿었다. 2013년, 이제 그라운드에 커다란 희망을 그릴 차례다. 
스포츠동아DB

평생의 꿈이자 생업인 야구를 그만둬야 했다. 팀에서 밀려나 자리를 찾지 못하기도 했다. 그러나 NC 김경문 감독은 그들에게 다시 한번 뛰자고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절대 배신하지 않는 노력을 믿었다. 2013년, 이제 그라운드에 커다란 희망을 그릴 차례다. 스포츠동아DB


■ NC 희망 조련사 김경문 감독

힘들고 고된 나날들이다. 취업은 어려운데 전세 값도 치솟아 깊이 사랑하는 연인도 결혼을 미루는 세상이다. 아이를 낳고 싶지만 경제적 이유로 포기하는 부부도 많다. 젊은층만이 아니다. 한창 일할 나이지만 자리를 잃은 가장, 평생 열심히 일하고 자식 뒷바라지를 했지만 노년이 막막한 부모들. 연이은 금융위기로 세상은 더 각박해졌고, 행복과 성공은 더 멀어졌다.

그러나 세상에는 아직 희망이 있다. 열심히 노력하면 꼭 성공할 수 있다는 희망이 없다면 더 깊은 절망의 수렁만 있을 뿐. 그럼 우리는 어디에서 희망을 만날 수 있을까. 2013년 봄, 희망이라는 단어를 수첩에 적은 NC 김경문 감독을 창원 마산구장에서 만났다. 희망과 김 감독 사이에는 어떤 끈이 있을까.


1군무대 못밟고 방출됐던 투수 김진성
끈질기지만 평범한 신인 외야수 권희동
특별지명 8명 모두 팀주축서 제외 눈물
푸른 유니폼 입고 절망 대신 희망의 빛

신생팀 험난한 도전…보람 느끼고 싶어
냉혹한 프로세계…최선을 다해 뛰겠다


그라운드에서 한참 수비훈련에 열심인 NC 선수들을 바라봤다. 야구를 몹시 사랑하는 팬들도 얼굴을 알아볼 수 있는 선수들은 열명 남짓. 대부분 새얼굴들이다. 그중 상당수는 평생의 꿈이자 생업인 야구를 한때 포기해야 했다. 그들에게 NC, 그리고 김경문 감독은 따뜻한 손을 내밀었다. NC 구단은 대규모 공개 선수선발을 2차례 열었다. 기존 8개 구단에서 방출된 선수들부터, 학교를 졸업한 뒤 갈 곳을 찾지 못해 방황하던 선수들까지 마산구장에 모였다.

김 감독은 투수 김진성을 가리켰다. “저 친구가 정말 잘 됐으면 좋겠다. 방출된 뒤 공개 선발에서 테스트를 받았다. 그리고 NC 유니폼을 입었다. 지난해 퓨처스(2군)리그에서 1년을 함께하며 지켜봤다. 정말 열심히 노력했다. 올해 1군 첫 시즌, 우리 팀 마무리를 맡길 생각이다. 자신감 있는 공으로 꼭 다시 할 수 있다는 희망을 많은 이들에게 던졌으면 좋겠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생에서 한두 차례 이상 큰 어려움을 겪곤 한다. 가장 큰 아픔 중 하나는 평생을 바친, 그리고 모든 노력을 다했지만 밀려나고 외면 받을 때다. 취업의 실패일 수도 있고, 원치 않은 퇴직일 수도 있다. 모두가 나를 외면할 때 누군가 다시 따뜻한 손을 내밀고 기회를 준다면, 꼭 다시 일어설 수 있을 텐데…. 세상은 생각보다 훨씬 냉혹하다. 김진성도 그랬다.

성남서고를 졸업하고 2004년 신인드래프트 2차 6라운드, 전체 42번째로 SK에 지명됐다. 42번째로 이름이 불린 신인. 좀처럼 기회는 없었다. SK에서 방출된 뒤 다시 테스트를 받고 넥센에 입단했지만, 2011년 또 한번 유니폼을 벗었다. 그동안 1군 마운드에 설 기회는 단 한번도 없었다. 절망의 끝에서 만난 희망이 NC의 푸른 유니폼이다. 아직 김진성이 1군에서 어떤 공을 던질지, 성공할 수 있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아직 성공한 것은 아니지만 분명한 것은 절망 대신 희망을 다시 만났다는 점이다.

김 감독이 주전 좌익수로 점찍은 주인공은 신인 권희동이다. 발이 빠르지 않은, 게다가 통통하고 작은 체격의 오른손 외야수. 홈런을 펑펑 터트리면 모를까, 프로 스카우트들이 눈여겨보는 스타일과는 모든 것이 정반대인 평범한 대학 선수였다. 김 감독은 “지난해 우리가 퓨처스리그에 있을 때 강진에서 경남대학교와 연습경기를 몇 차례 했다. 권희동이라는 선수가 눈에 띄었다. 뭐든지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경남대 감독에게 ‘저 선수는 어떠냐?’고 물었다. ‘매 순간 끈질기다. 찬스를 놓치지 않으려고 최선을 다한다’는 답이 돌아왔다. 팀에 지명된 후에도 똑같은 인상을 줬다. 물론 한국프로야구의 1군 수준은 매우 높다. 신인으로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을 것이다. 그래도 기회를 주겠다. 감독이 그냥 멍 하니 서있는 것처럼 보여도, 하나하나 눈여겨본다. 진지한 태도, 적극적인 모습에서 나도 가능성을 봤다”고 말했다.

NC에서 가장 유명한 선수는 주장 이호준이다. 특별지명으로 영입한 8명도 팬들에게 잘 알려진 선수들이다. 투수 이승호와 송신영은 FA(프리에이전트)로 다른 팀과 계약했을 정도로 ‘잘 나가는’ 선수들이었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NC에서 손꼽히는 그 8명도, 전 소속팀의 20인 보호선수 명단에는 들지 못했다. 핵심전력, 유망주를 보호하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겠지만, 팀의 주축은 아니었다. 그들 모두에게 NC는 또 한번의 희망이다.

“같은 포지션에 뛰어난 선수가 있어서, 혹은 부상과 부진을 겪어서 등 여러 어려움을 경험한 선수들이 많다. 우리 팀은 그들이 다시 한번 뛸 수 있는 무대다. 힘겨운 이들이 많다. 뛸 수 있는 팀이 없었던 한때, 좌절했던 선수들이 멋진 경기를 보여준다면 많은 사람들에게 희망을 전달할 수 있지 않을까. 신생팀 NC가 창단한 중요한 이유 중 하나인 것 같다. 우리가 최선을 다해 뛰는 것이 많은 분들에게 간절한 희망의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는 길일 것 같다.”

김 감독에게로 다시 시선을 돌렸다. 오직 승리만이 인정받는 냉혹한 프로의 세계. 김 감독은 그 속에서 승리의 가치를 더 빛나게 할 희망을 품고 있었다. 2008년 그는 베이징올림픽에서 9전승 우승으로 한국야구에 큰 선물을 안겼다. 그리고 5년이 흘렀다. 그해 창간한 스포츠동아도 창간 5주년을 맞았다. 갓 태어난 신문에서 국내 스포츠신문 최정상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가고 있다.

김 감독은 새로운 출발을 앞두고 있다. 매년 우승에 도전했던 최고 인기팀 사령탑에서 아무 것도 정해진 것이 없는 신생팀 감독이 됐다. 김 감독은 1982년 프로야구 원년을 제외하고 역대 3번째로 순수 창단팀의 초대 사령탑이다. 김인식 한국야구위원회(KBO) 기술위원장이 1991년 쌍방울의 1군 첫해, 승률 0.425와 6위의 성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기도 했지만 지금까지 2명의 창단팀 초대 감독은 모두 재계약에 실패했다.

빙그레 배성서 창단 감독은 1986년 7위로 최하위에 그친 데 이어 1987년 6위로 한 계단 올라섰으나 옷을 벗었다. 빙그레의 젊은 유망주들은 2대 김영덕 감독 때 드디어 꽃을 피웠다. 쌍방울 역시 1992년 8위로 떨어지자, 많은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신생팀을 지휘한 김인식 감독과 재계약하지 않았다.

‘창단 감독은 그 팀에서 4강 진출에 성공한 적이 없다’는 우회적 표현으로 왜 신생팀 초대 감독이라는 도전을 택했는지를 김 감독에게 물었다. 김 감독은 “내가 3번째 창단 감독이냐?”고 웃으며 “코치들과 함께 보람을 느끼고 싶었다. 새롭게 선수들을 모아 팀을 만든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얼마나 보람된 일이 될까’, 그런 생각을 했다”며 다시 미소를 지었다. 프로야구는 1982년 ‘어린이에게 꿈을, 젊은이에게 낭만을, 국민에겐 건전한 여가 선용을’이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고 출범했다. 이제 9번째 구단 NC가 그라운드에 커다란 희망을 그릴 차례다.

이경호 기자 rush@donga.com 트위터 @rushlk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