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제2의 김태희’만 20여 명에 이른다. (왼쪽 위부터) 허이재 경지혜 구잘 김다은 지연 송주연 김상미 나탈리아 박희본 서혜원 지주연 최보윤 소영 이민정 한다민 한태윤 한혜린 강소라
얼마 전 케이블채널의 모 프로그램에 '제2의 김태희' 이민선이 출연한다는 소식이 화제였다.
이민선은 김태희처럼 이목구비가 또렷한데다 서울대 의류학과 출신이다. 성형외과 전문의들이 꼽는 당대 최고의 미인 김태희를 닮은 것으로 모자라 국내 최고대학까지 졸업했다는 소식은 당연히 대중의 시선을 잡았고, 이민선은 각종 포털사이트의 실시간 급상승 검색어 상위를 장악했다.
그러나 '신상 엄친딸'을 반기는 시선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또 제2의 김태희야?' '도대체 몇 번째 김태희려나' 하는 삐딱한 목소리도 높았다.
언제부턴가 '제2의 ○○○'는 연예인이 데뷔할 때 붙는 단골 수식어가 됐다. 각종 매체를 통해 신인 연예인을 접한 대중들이 누구누구 닮았다며 애칭으로 붙여주기도 하지만, 보다 빠르고 쉽게 신인의 인지도를 높이고 싶은 소속사들이 전략적으로 흘리는 경우도 많다.
여자 신인 중 예쁘장하거나 명문대 출신이면 '제2의 김태희', 늘씬한 키에 긴 생머리를 자랑하면 '제2의 전지현', 청순하면 '제2의 심은하', 풍만한 몸매는 '제2의 김혜수'가 되는 식. 남자는 춤을 잘 추면 '제2의 비', 눈망울이 서글서글하면 '제2의 장동건', 고급스러운 이미지는 '제2의 배용준'이 되는 것이다.
덕분에 '제2의 ○○○'가 난무하지만 진짜 닮은꼴 연예인은 찾아보기 힘든 상황. 대중들도 처음엔 '제2의 ○○○가 데뷔했다는데 어딘지 모르게 닮긴 했네요'라며 호응했지만 이젠 '역대 제2의 ○○○를 모아봤습니다'는 글을 올리며 식상하다고 말한다.
▶ '제2의 ○○○' 단골 스타는 김태희
'제2의 ○○○' 마케팅에 가장 많이 이용되는 스타는 단연 김태희다. 외모가 닮았다는 이유로 김태희와 엮기도 하지만 소위 명문대 출신이나 CF에 김태희의 대역으로 출연하는 등 조금이라도 공통점을 찾을 수 있으면 무조건 '제2의 김태희'가 된다. 역대 '제2의 김태희'만 20여 명에 이른다.
1호 '제2의 김태희'는 2004년 KBS 2 시트콤 '방방'에 출연했던 허이재다. 당시 고교생이었던 허이재는 볼록한 이마, 쏟아질 것 같은 큰 눈, 웃을 때의 입매가 김태희를 닮았다는 평을 받으며 '제2의 김태희' '고교생 김태희' '리틀 김태희'란 꼬리표를 달았다. 이어 배우 이민정 강소라 한혜린 한다민 박희본 한태윤, 가수 김상미, 그룹 티아라의 지연, 애프터스쿨의 소영 등이 또렷한 이목구비를 앞세워 '제2의 김태희'가 됐다.
‘제2의 ○○○’ 단골 스타는 외모와 학벌 모두를 갖춘 김태희다. 스포츠동아 양회성 기자.
서울대 출신의 모델 최보윤은 2005년 도브 CF를 찍으며 '제2의 김태희'라고 불렸다. 외모는 닮지 않았지만 서울대 출신이라는 '학벌'이 닮았기 때문. KBS 공채탤런트로 선발돼 '연예가중계' 리포터로 활약하고 있는 지주연도 마찬가지다. 서강대 출신의 배우 송주연도 '지성과 미모를 겸비했다'는 이유로 '제2의 김태희'가 됐다.
모델 김다은은 휴대전화 광고에서 김태희의 뒷모습 대역으로 출연했으며 배우 서혜원은 예쁘장한 외모에 김태희처럼 울산에서 자랐다는 이유로 '제2의 김태희' 목록에 올랐다.
방송에 나온 후 입소문으로 '제2의 김태희'가 된 경우도 있다. SBS '도전 성공시대-내일은 모델퀸'에서 주부 모델 1위를 차지한 경지혜가 대표적인 사례. 눈매와 턱선, 흰 피부가 김태희와 닮아 '아줌마 김태희'라 불리는 경지혜는 역대 '제2의 김태희' 중 가장 김태희를 닮았다는 평을 받기도 한다.
KBS '미녀들의 수다'에 출연한 우즈베키스탄 태생의 구잘 투르수노바는 흑발로 염색한 후 '우즈베키스탄 김태희', 콜롬비아 태생의 나탈리아는 '콜롬비아 김태희'란 별명을 얻기도 했다.
▶ '제2의 ○○○' 효과? 얻는 것만큼 잃는 것도 많아
'제2의 ○○○'로 데뷔하면 일단 대중의 관심을 끌기엔 유리하다. 매년 수백 명의 신인이 쏟아지는 연예계에서 살아남기 위해선 최대한 이름을 빨리 알리고 인지도를 높여야 한다. 맨땅에 헤딩하듯 본인만의 매력을 강조하기보단 이미 성공한 연예인이 구축한 이미지에 편승하는 편이 유리하다는 계산이다. 일단 대중들이 '얼마나 비슷할까'라는 호기심을 가지면 이를 신인 연예인에 대한 관심으로 돌리기 쉽다는 것.
그러나 관심이 무조건 애정이 되는 것은 아니다. 김태희와 닮은 외모로 관심을 받은 그룹 티아라의 지연은 '제2의 김태희'라는 별칭 덕분에 울고 웃었다. 별칭 덕분에 유명해졌지만 별칭 때문에 '대체 어디가 닮았지?' '한번 떠보려는 수작아니냐' 등 악플에 시달렸기 때문. 소속사의 홍보 수단으로 '제2의 김태희'라는 수식어를 달고 데뷔한 결과였다.
그룹 티아라의 지연은 전략적으로 ‘제2의 김태희’ 수식어를 달았다가 악플에 시달려야 했다.
'제2의 ○○○'가 인기를 보장하는 것도 아니다. '반짝' 관심을 끌어낼 수는 있지만 관심을 지속시키는 파워는 보장하지 못한다. 잘못 인식되면 오히려 족쇄만 차는 꼴이 된다.
김태희를 등에 업고 데뷔한 연예인 중 인기스타 반열에 오른 배우는 그나마 이민정과 허이재 정도다. 이민정은 데뷔 3년차인 올해 초에야 드라마 '꽃보다 남자'에서 하재경 역으로 출연하면서 '제2의 김태희'가 아니라 '배우 이민정'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꽃보다 남자'로 뜬 뒤 드라마 '그대, 웃어요'에서 주연까지 꿰찼지만 지금도 토크쇼에 출연하면 '김태희 닮았다는 말을 많이 듣는데'라는 질문을 피할 수 없다.
드라마 '궁s', '싱글파파는 열애중' 영화 '걸프렌즈', '19' 등에 출연하며 활발한 활동을 벌이며 인기를 얻고 있는 배우 허이재도 마찬가지. 허이재는 지난해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데뷔 후 줄곧 따라다니는 '제2의 김태희'라는 수식어에 대해 "물론 정말 예쁘고 훌륭한 선배님과 비슷하다고 얘기해줘서 다행이지만 연기자로서 나만의 색깔을 내는 데에는 걸림돌이라고 생각한다"고 토로한 바 있다.
하지만 이들이 '제2의 김태희'라는 수식어 없이 데뷔했다면 이만큼 성공할 수 있었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결국 신인 연예인들에게 '제2의 ○○○'는 버리기도 취하기도 어려운 '계륵'이 되고 있다.
김아연 기자 aykim@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