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배우 조휘.스포츠동아DB.
뮤지컬배우 조휘가 종업원이 가져 온 요리접시를 보더니 궁금해 한다.
“유린기라는 거예요. 먹어 봤을 텐데 ….”
“이거 좋아하시나보죠?”
조휘의 말에 그냥 웃었다. 실은 옆 테이블이 주문하는 것을 보고 별 생각없이 주문한 것이다.
조휘와의 인터뷰는 서울 광화문의 한 중국음식점에서 진행됐다. 스포츠동아에서 누우면 코 닿을 거리다.
날씨가 하도 매서워 “그저 가까운 곳이면 된다”는 생각으로 정한 것이다.
조휘는 요즘 뮤지컬 ‘영웅’에서 안중근 역으로 출연 중이다. 안중근 역으로 남우주연상을 두 개나 타낸 정성화와 더블 캐스팅이다.
정성화 ‘정중근’에 이어 조휘는 ‘휘중근(어쩐 일인지 조중근이 아니다)’이라는 애칭으로 불리며 팬층을 넓히고 있다. 그토록 소원하던 ‘휘중근’으로 살고 있는 재미가 어떨까.
조휘가 고기 한 점을 베어 물더니 말문을 뗐다.
“‘영웅’ 초연부터 함께 했으니 햇수로 3년째죠(새해가 되었으니 4년째가 됐다). 너무 행복해요. 지금까지 뮤지컬 생활을 해 왔지만, 제 이름을 조금 더 알리게 된 계기가 됐죠. 다행히 칭찬도 많이 듣고.”
조휘는 ‘영웅’이 초연된 2009년부터 안중근을 도와 거사에 참여하는 저격수 ‘조도선’ 역으로 출연해 왔다. 그러다 이번 공연에서는 드디어 ‘안중근’으로 ‘영전’을 한 것.
‘휘중근’에 대한 관객과 평론가들의 평은 상당히 후한 편이다. 정성화의 ‘안중근’과는 또 다른 매력이 있다는 소리를 듣는다. 외모부터가 안중근과 많이 닮았다는 얘기도 있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정성화의 그림자가 부담스럽지는 않을까 싶다. 부담이 되는 선배가 버티고 있을 경우, 보통은 둘 중 하나가 된다. 주눅이 들어 선배가 하는 대로 따라하려 하거나, 반대로 벗어나기 위해 지나치게 애쓰는 경우. 둘 다 어쨌든 연기가 딱딱하게 굳어진다는 단점이 있다.
“저도 이 얘기를 하고 싶었어요. 사실 (정)성화 선배도 왜 그런 게 없겠어요. 조연하던 후배가 같은 역할을 하게 됐는데. 그런데 선배가 큰형님답게 너그럽게 베풀어주셨어요. 연습 기회도 많이 주시고. 아니다 싶으면 조언도 해주시고.”
조휘는 “라이벌 의식같은 것은 없다”라고 잘라 말했다. 일단 “졌다”하고 숙이고 들어갔다고 했다.
“하나라도 더 배우려고 하죠. 좋은 것이 있으면 따라 하고. ‘나 죽었소’하고 들어갔습니다. 하하!”
주연은 배우 대기실도 독방을 쓴다. 평일에는 혼자 쓰지만 주말은 2회 공연이 있어 정성화와 마주칠 수밖에 없다. 분위기는 화기애애하기만 하다.
배우들만 그런 게 아니다. 팬들도 마찬가지다. 팬클럽이 선물이라도 들고 올라치면, 상대 배우 것도 챙겨올 정도이다.
뮤지컬 배우 조휘.스포츠동아DB.
○ “이 수염 네 거냐?” 하더니 합격통보
사실 조휘는 2009년 초연 때부터 ‘안중근’을 노리고 있었다. 오디션도 ‘안중근’ 역에 도전했지만, 탈락해 ‘조도선’을 맡았다.
올해 초 ‘영웅’은 정성화, 양준모, 신성록이 번갈아 가며 ‘안중근’을 맡았다. 지방공연까지 마무리된 것이 2월 말. 제작사(에이콤)에서 배우들을 대상으로 조사를 했다.
8월에 뉴욕에서 ‘영웅’을 공연하고 연말에 국립극장에서 재공연을 하는데, 배우들의 참여의사를 물은 것. 단, 조건이 있었다. “뉴욕공연에 참여할 경우 국내 재공연에도 참여해야 한다”라는 것이었다.
뉴욕공연과 국내 재공연의 시간이 촉박해 연습일정상 당연한 조건이었다.
“윤호진 대표님께서 ‘뉴욕에 같이 가자’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뉴욕까지는 가겠다고 했어요. 하지만 재공연에서 ‘조도선’은 못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원래 대표님과 약속한 게 있었거든요. 대표님께서 ‘그렇다면 안중근으로 오디션을 봐라’하시더군요.”
3월에 ‘안중근’ 역으로 오디션을 봤다. 심사위원들이 “잠시 나가 있어라”고 했다. 나와 있으니 잠시 후 심사위원들이 방에서 나왔다.
윤대표가 조휘의 수염을 잡아당겨보면서 “이거 네 거냐”고 묻더니 “준비 잘 해라”고 했다. 10분 만에 ‘안중근’ 역이 확정된 것이다.
안중근이 뤼순감옥에서 사형을 당했을 때가 32세였다.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거사를 시행한 것은 31세. 공교롭게도 조휘와 나이가 같다.
“제작사에 ‘오디션을 보겠다’고 선언한 것도 나이를 고려한 부분이 있었어요. 반드시 안중근 의사가 거사를 행한 나이에 안중근 역을 해봐야겠다는 생각이었죠. 이 나이 때만 느껴볼 수 있는 것이란 게 있잖아요. 돌이켜보면 올해 한 것이 주효한 것 같아요.”
‘영웅’을 보면, 거사를 행하기에 앞서 안중근이 십자가 아래에서 기도하는 장면이 있다. ‘십자가 앞에서’라는 신이다.
이 장면에서 안중근은 “만약 거사가 성공한다면, 거사 직후 이토 히로부미와 평화를 위해 기도할 수 있는 짧은 시간을 허락해 달라”고 기도한다.
“어느 저격수가 자신이 죽인 사람을 위해 기도하겠어요. 이런 마음이 어떻게 나올까요. 안중근 의사가 천주교 신자가 아니었다면 힘들었을 겁니다. 저는 천주교 신자가 아니지만, 안중근 의사를 이해하기 위해 교리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조휘는 고려대학교 체육교육학과를 졸업했다. 뮤지컬과는 상당히 거리가 있어 보인다. “그 학과 출신 중 뮤지컬배우는 혼자가 아닐까”라고 물으니 “아마 그럴 것”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조휘는 어찌하여 배우의 길을 걷게 되었을까.
“얘기는 좀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 중학교 2학년 때 청소년예술제 같은 데에 우연히 참가하게 됐어요. 해마다 공연을 했죠. 고등학교에 진학해서도 마찬가지였고요.”
조휘의 어머니는 대한민국의 어머니 대부분이 그렇듯 아들에게 큰 기대를 갖고 있었다. 조휘는 어려서부터 공부 쪽은 말할 것도 없고 서예, 피아노, 합기도 등 안 해 본 과외가 없었다.
하지만 모두 조금 하는 시늉만 하고 그만 두었다. 적성이 아니었던 것이다. 합기도는 유일하게 부모가 그만두게 한 종목이었다. 하도 싸움을 하고 돌아다녀 못 하게 했단다.
“옛날엔 장난이 아니었죠. 초등학교 때부터 누가 시비를 걸면 말로 안 하고 바로 주먹이 날아갔으니까요. 중학교 때 제일 많이 놀았어요. 학교 끝나면 거의 당구장에서 살았을 정도니까. 하여튼 때렸으면 때렸지 맞고 다니진 않았어요. 그렇다고 폭력서클 같은 곳에 들어간 건 아니고요.”
고2 겨울방학 때 연극제에 나가겠다고 하니 어머니가 결사반대를 했다. “이 중요한 시기에 무슨 연극이냐”는 것이었다.
아들과 어머니는 타협을 했다.
아들은 어머니가 원하는 대로 사범대에 진학을 하겠다고 했다. 대신 대학에 들어가면 그때는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두어 달라는 조건이었다.
이렇게 하여, 조휘는 고려대학교 체육교육학과에 진학을 하게 된다.
합격통지서를 받자마자 조휘는 고려대학교 극예술연구회를 찾아가 “연극을 하고 싶다”라고 했다. 선배들의 눈이 모두 휘둥그레졌다.
선배들은 “입학식도 하기 전에 찾아온 놈은 전무후무”라고 놀라워했다.
학기가 시작되면 정문 앞에 벽보를 붙이고, 북 치고 장구 치며 동아리 신입회원을 모집해도 올까 말까할 판에 이렇게 스스로 걸어 들어온 후배가 얼마나 예뻐 보였을까.
선배들은 이렇게 예쁜(?) 후배에게 첫 역할을 주었다. 암전이 되면 무대 위에서 의자를 들고 내려오는 역이었다. 하하하!
고려대 극예술연구회는 여운계, 손숙 등 명배우를 배출한 유서깊은 단체이다. 조휘는 이곳에서 작품에 임하는 자세, 창작극에 대한 마인드를 자연스럽게 익힐 수 있었다.
보통 작품 하나를 무대에 올리기에 앞서 토론회(테이블작업이라고 한다)만 한 달 이상 했다.
조휘는 “지금도 같은 조건이면 창작물을 선호하는 편인데, 이게 다 극예술연구회 때 만들어진 습성”이라고 했다.
뮤지컬 배우 조휘.스포츠동아DB.
○ 스스로 지은 예명, ‘조휘’
대학교 3학년 때 공연기획사에 취직한 지인 한 명이 “오디션을 보러 오라”고 연락을 해 왔다. “난 연극 아니면 안 한다”고 했더니 “보통 뮤지컬하고는 다르다. 메시지가 뚜렷하고 드라마가 강한 작품”이라며 오디션 볼 것을 종용했다. ‘블루사이공’이라는 작품이었다.
“트레이닝복에 운동화를 신고 오디션을 보러 갔죠. 갔더니 사람들이 와글와글 모여 있는데 모두 재즈화를 신고, 몸을 풀고, 턴을 돌고 장난이 아닌 거예요. 이런 신세계가 있나 싶었죠.”
노래도 준비해 간 것이 없어 가요곡을 불렀다. 그런데 덜컥 오디션을 통과했다. 작은 역할이었지만 조휘에게는 큰 의미가 있었다.
그런데 행운은 한 번뿐이었는지, 이후는 오디션을 봤다 하면 떨어졌다. 2003년 ‘팔만대장경’, 2004년 ‘그리스’에 출연했지만 여전히 작은 역할과 앙상블로 무대에 서야 했다. 그나마 1년에 한 작품 꼴이었다.
선배들은 “저놈, 딴따라질 한다”고 손가락질을 해댔다. 자괴감이 들었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한 조휘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2005년 공익근무요원으로 입대를 했다.
“가만히 제 자신을 돌아보니 오디션에서 탈락하는 이유가 노래 때문인 것 같았어요. 2년이라는 시간을 벌었으니, 2년을 목표로 노래만 파보자고 결심했죠.”
낮에는 공익요원으로 근무를 하고 밤에는 연습을 했다. 공익근무요원 월급 14만원으로는 밥값을 해결하고, 일주일에 두 번씩 중학생 영어과외를 해 레슨비를 벌었다.
춤도 안 되니까 강남역 인근 댄스학원에 나갔다. 돈이 없어 노래는 독학을 하기로 했다.
자존심 문제로 집에는 손을 절대 벌리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했다.
“조승우, 류정한 선배의 노래가 교과서였죠. ‘지킬앤하이드’ 시디를 사서 무작정 따라 불렀어요. 완전 독학인 겁니다.”
나중에는 하도 들어 시디가 툭툭 끊어졌다. 망가지면 똑같은 시디를 다시 구입해 듣고 또 들으며 연습했다.
2년이 차고, 제대를 할 때쯤 예전에 녹음한 자신의 노래를 들어 보았다. “이제 오디션을 봐도 되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노래가 달라진 것이다.
‘조휘’라는 예명도 이때 지었다.
“성은 바꾸기 싫었어요. ‘조’ 뒤에다 자음과 모음을 다 한 번씩 조합해 보았죠. 일단 멋있는 것들. ‘건’, ‘수’를 붙여봤는데 ‘조건’, ‘조수’같은 단어가 되어 버리더라고요. 하하!”
이름을 외자로 지은 것도 치밀한 계산(?)의 산물이다. 오디션을 볼 때 심사위원들이 세 글자 이름만 보다가 외자 이름을 보면 한 번이라도 더 눈길을 끌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결국 ‘조휘’로 예명을 짓고, 아버지에게 보여드렸다. 아버지가 ‘빛낼 휘’라는 한자를 정해주었다. 조휘는 “이름을 바꾼 뒤로 일이 잘 풀리고 있다”며 웃었다.
참고로 조휘의 본명은 ‘조성범’이다. 조휘는 “본명도 절대 나쁘지 않다”고 강조했다.
○ 공연 전날은 2시간 밖에 못 자
조휘는 목표를 정하면 철두철미하게 준비해 시행에 옮기는 스타일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철저하게 거사를 준비한 안중근과 통하는 점이 있다.
“제가 거의 메모광 수준이거든요. 매일 제가 한 공연에 대한 노트를 적습니다. 공연이 끝나면 한 번 들여다보고, 집에 가서 잠들기 전에 또 보죠. 공연 전날이면 2~3시간 정도밖에 못 자요. 스스로를 너무 힘들게 하는 스타일이죠.”
일단 ‘뭔가를 해야겠다’라고 마음먹으면, 할 수 있는 것은 다 해보고 무대 위에 올라가겠다는 주의이다. 점점 좋아지면 된다는 것이 아니라, 첫 공연에서 베스트를 보여주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물건을 만들어 팔 때 ‘일단 써 보시고 한 달 뒤에 완벽하게 해드릴 게요’할 수는 없잖아요. 말도 안 되죠. 공연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하다보면 좋아질 거예요’라고 할 수 없죠. 첫 공연을 하기 전에 할 수 있는 것은 다 해보려고 합니다. 간접경험뿐만 아니라 직접경험도 마찬가지로요.”
조휘는 공연이 잡히면 빈 노트를 한 권 마련해놓고 목차를 정한다. 공연 스케줄, 캐스팅, 주제, 의의를 적고 목표는 대목표와 소목표로 나눈다.
주제도 마찬가지로 대주제와 소주제로 따로 묶는다. 세부적으로 들어가 캐릭터 분석을 적는다. 외형은 어떻게 할 것인가, 내제는 어떻게, 대사는 겉대사와 속대사 ….
이렇게 해서 작품을 하나 마치면 노트 한 권이 완성된다. 조휘는 “내 나름의 교과서”라고 했다.
많은 배우들이 이런 노트를 만들고 있을 것 같지만 사실은 몇 명 안 된다. 조휘는 이런 습관을 대학 극예술연구회 시절에 배웠다.
마지막으로 조휘는 관객에게 이렇게 말했다. 듣고 보니 상당히 그럴 듯해 원문을 그대로 옮긴다.
“한미 FTA니 뭐니 국내 정세가 어렵고, 김정일 사망으로 남북관계도 그렇고, 일본과 중국도 문제고 … 100년 전 사람인 안중근 의사가 그토록 외쳤던 동양평화는 아직도 이루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100년이 지나 우리 배우들이 굳이 그때의 이야기를 끄집어내어 발표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을 겁니다. 분명히 던져주는 메시지가 있기 때문이지요. 안중근 선생이 던진 평화사상은 결코 100년 전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꼭 와서 ‘영웅’을 보셔야 합니다.”
멋지다.
그의 말이 끝나자 우리 두 사람은 텅 빈 요리접시를 앞에 놓고 박수를 쳤다.
짝짝짝~
사진제공|에이콤 인터내셔널
스포츠동아 양형모 기자 ranbi@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트위터 @ranbi36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