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 금요일은 모교 운동장에서 야구동아리 OB전에 참석하고, 토요일은 사직에서 가족과 함께 오랜만에 야구를 관람했다. 특히 사직에서는 자리가 없어 가족 모두가 계단에서 롯데와 SK전을 지켜봤다. 그래도 즐거운 주말이었다. 이번 학기는 출장과 여러 가지 일 때문에 야구장에 자주 가지 못했는데 이틀연속 야구행사에서 참석해서 새로운 기운을 충전했다. 특히 OB전은 매년 개최되지만, 나이를 먹어갈수록 더욱 애잔하다. 마흔이 넘은 선수들이 아직도 승부근성을 불태우는 것이 아름답기도 하고 한편으론 힘들어 보이기도 한다. 그래도 100여명 이상이 매년 모인다는 것은 축복이다. 특히 올해는 미국에서도 3명이나 참석했으니 그저 고마울 따름이다. 그중에 한명은 대학시절 2학년까지 선수로 활약하다 그 뒤 야구동아리에 가입하고, 공부로 전향하여 미국에서 학위를 받고 미국 주립대 교수로 있다. 물론 반대인 경우도 있었다. 야구동아리에서 워낙 잘 던지는 후배는 야구부의 구애를 받은 적도 있어서, 가끔은 농담조로 “야구부와 트레이드 하자는 말”도 하곤 했다. 마흔이 넘은 그 후배는 아직도 공이 싱싱하다. 아무리 ‘아마추어’수준이라지만 21년을 투수로 버티고 있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특히 그의 너클볼은 선수수준을 넘어선다. 오직 성실과 관리로 버텨 온 세월이었다. 모교동아리 팀과 야구부는 매년 축제 때 정기전을 갖는다. 지금도 그 전통은 이어진다. 동기 한명은 당시 김정민을 상대로 도루한 것을 지금도 자랑으로 여기고, 후배 투수는 양준혁과 승부에서 밀리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필자가 4학년 때 모교야구부의 라인업은 괜찮았다. 1번 전준호, 3번 양준혁, 4번 나진균, 5번 이민호, 6번 김정민 등. 한때 빙그레의 떠오르는 태양이었던, 가장 야구에 미치고 야구를 사랑했던 이민호가 버거씨 병으로 조기은퇴 한 것은 지금도 가슴 아프다. 어깨부상으로 LG에서 조기은퇴 했지만, 야구만큼이나 공부에도 남다른 열정이 있었던 나진균 전 프로야구선수협사무총장도 기억에 남는다. LG와 계약하고 난 뒤 계약서의 문제점을 조목조목 짚던 그의 사회문제 인식이 훗날 프로야구선수협회의 창립에 토대가 될 줄이야 당시에는 어떻게 알았으랴! 그리고 아직까지 프로야구 선수로 활동하는 전준호, 양준혁, 김정민. 수많은 스타들이 명멸해간 프로야구에서 지금도 살아남은 그들. 그 중 가장 자질이 뛰어났다는 양준혁도 당시 ‘아마대표팀’의 주전자리 확보가 여의치 않았다. 단언하건데 이들은 타고난 선수가 아니다. 야구는 타고난 천재성으로 빛을 발할 수는 있지만, 오래 살아남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어느덧 세월이 흘러 이제 ‘큰 바위의 얼굴’로 다가오는 그들. 우리같이 평범한 사람들에게 이들은 ‘희망’으로 다가온다. 평범함이 비범함과 진검승부를 할 수 있는 것, 야구 만의 매력이리라. 전용배 동명대학교 스포츠레저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