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기자가사랑한故이청준]故이청준,문단의별‘천국의축제’찾아하늘로

입력 2008-07-31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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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거 참 듣던 중 희한한 얘기로군요. 아닌게 아니라 나도 이 선학동 비상학 이야기는 오래 전에 한 번 들은 일이 있었소마는 …이따 저녁 요기나 끝내고 나시거든 심심풀이로나 들려드릴까” -‘선학동 나그네’ 중에서 ‘희한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었다. 사회와 개인이 품고 있는 특별한 사건들을 세세하게 알아내고 싶었다. 가슴 속 한을 삭여야 하는 소리꾼의 과거를 풀어헤치듯 세계가 안고 있는 부조리를 밝히는 일을 하고 싶었다. 이청준은 ‘기자’를 열망하던 시절, 기자 본인이 열정적으로 존경한 작가였다. 진로 고민으로 덜컥거릴 때마다 이청준은 불쑥 레이저를 쏘는 양 빛을 보냈다. 그의 소설 ‘소문의 벽’에 등장하는 ‘전짓불’처럼 그는 내게 ‘전짓불’을 들이댄다. 불안감으로 좌절하던 얼굴에 불을 비추면서 “너 어떻게 살 거니?” 물음을 강요했다. 그러나 그 질문은 “좌익인가? 우인인가?” 단답형을 강요하던 반공 시대의 전짓불처럼 폭력적이지 않았다. ‘소문의 벽’의 전짓불은 한국전쟁 중 극 중 인물이 어두컴컴한 방에서 질문을 받던 상황에 등장한다. 질문자가 좌익인지 우익인지에 따라, 대답을 하는 소년과 어머니의 목숨이 생사를 오간다. 그런데 전짓불 때문에 질문자 얼굴이 보이지 않고, 공포심에 몸서리치는 것이다. ‘소문의 벽’은 실체 없는 언어 때문에 겪는 불안감과 표현 욕구, 사회적 부조리를 다룬 소설이다. 실제로 대학시절 가정교사를 하며 안정된 삶을 살지 못했던 이청준은 서울대 문리대 강의실에서 잠을 잘 때 수위가 들이대던 전짓불 공포를 이 소설에 반영했다고 한다. 왜 기자를 지망하던 예비 기자가 이청준에게 매료될 수밖에 없는지, 왜 그가 대중적으로 사랑받는 작가였는지 문학의 매력을 꼽아보았다. ○ 진실에 목마른 작가, 진실을 탐구하다 이청준의 문체는 은근한 멋이 있다. 시끌벅적하게 소리를 지르기보다는 현실을 냉혹하게 관찰한 뒤 뒤로 꼬집어주는 기술이 대단하다. 비밀스러운 수근거림과 허장성세는 한 끝 차이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말하고 싶은 욕구는 누구에게나 있다. 그리고 그러한 개인의 행동을 막으려는 방해 요인 또한 어디든 존재한다. 개인과 세계, 다소와 소수의 대립에서 작가는 항상 진실 편에 선다. 특히 그가 소설에서 자주 사용하는 ‘액자소설’ 기법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독자의 궁금증을 증폭시킨다. 화자는 신적인 위치가 아니다. 동일한 인간으로서 독자가 함께 추리해가며 “이거 왜 이런 거야?” 라는 호기심을 끌어낸다. 영화 서편제에서 마치 ‘오정해와 김명곤은 실제로 어떤 사이야?’, ‘오정해의 눈은 왜 멀게 된 걸까?’ 질문을 던지며 영화를 보는 것처럼 말이다. ○ 경계의 예술가, 절제된 아름다움을 선보이다 이청준은 ‘매잡이’, ‘서편제’, ‘줄’을 통해 장인의 매력을 보였다. 개인적인 아픔을 본인이 믿는 예술 세계로 승화시킨 예술가들이 자주 등장한다. 이때 주목할 점은 그들은 초인도 아니고, 나약한 사람도 아니다. 일상과 일탈 사이에서 교묘하게 줄타기를 하는 ‘경계인’이다. 그들은 절제를 알고 삶의 수위를 조절한다. 행여 자신의 노력이 물거품이 되더라도 ‘고민’의 끈을 놓지 않고 이유를 밝힌다. ‘병신과 머저리’에서 고통의 원인을 찾으려던 주인공도 그랬다. 이청준이 그려낸 인물들은 감정이 철철 넘치지도 않고, 푸석푸석 건조하지도 않다. 절제된 중용의 캐릭터가 독자들을 깊게 끌어들인다. ○ 그럼에도! 슬픔은 세상과 화해하는 힘이 된다. 기자의 고3시절, 주말이면 남산 도서관 문학 열람실에서 이청준 소설에 심취했다. 그 때 심금을 울린 글은 ‘별을 보여드립니다’ 단편이었다. 우정과 의리가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덕목이라 믿던 사춘기 때였다. 천문학을 전공하는 주인공이 망원경으로 친구에게 별을 보여준다. 이 때 별은 단지 하늘에 떠 있는 물리적인 별만이 아니었다. 매일 꿈을 꾸는 마음 속 별이다. ‘벌레 이야기’에서는 아이를 잃은 여자가 증오심을 떨치려고 유괴범을 찾아가기까지 한다. 등장인물은 힘든 감정, 고통과 화해하려고 애를 쓴다. 다른 소설인 ‘별을 기르는 아이’에서도 등장인물이 누나를 찾겠다고 항상 돌아다닌다. 이미 교통사고로 죽고 없는 누나였지만, 이 행동은 역설적으로 살아가는 힘이 된다. 영화로도 유명한 ‘축제’도 마찬가지다. 과거를 잃는 것은 자기가 살아온 역사를 잃는 것이다. 죽은 자의 장례식이 결국 축제 한마당으로 변하듯, 남은 자는 열심히 살아야 한다. 고인이 된 이청준이 독자들에게 바라는 것도 아마 삶을 대하는 긍정의 힘일 것이다. 변인숙 기자 baram4u@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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