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 년 전부터 메이저리그를 떠들썩하게 만드는 약물, 스테로이드. 배리 본즈, 로저 클레멘스, 에릭 가니에 등 메이저리그를 대표했던 스타들의 이름이 매스컴에 회자되고, 이들이 장시간에 걸쳐 세웠던 화려한 기록들이 강렬한 유혹인 스테로이드 앞에 속절없이 무너져 내리고 있다. 도대체 스테로이드가 뭘까. 스테로이드는 과연 평범한 선수를 ‘인크레더블 헐크’로 변신시키는 신기의 묘약인지, 또한 이를 복용한 선수들의 기록이 어떻게 변화하고 있는지 살펴보고 메이저리그 선수들의 사용 실태를 파헤쳐 봤다.
○ 스테로이드의 실체
스테로이드는 스테롤, 담즙산, 성호르몬과 같은 지방 용해성 화합물의 총칭이다. 크게 코티코 스테로이드(부신 피질 스테로이드)와 아나볼릭 스테로이드(단백 동화 스테로이드)로 분류된다. 천식 환자들이 복용하는 약에는 이 스테로이드 성분이 들어있다.
주된 역할은 염증을 완화하고 약물 과용을 방지시킬 수 있다. 여기까지는 선수들이 스테로이드를 사용하는 이유와 연관성이 없는 것 같다. 하지만 그 외의 기능인 신선한 혈액 생산, 면역 시스템 강화, 근육 발달 등의 효능에 이르면 답이 보이기 시작한다.
거의 모든 약품을 구입할 때 설명서에 이와 같은 말이 적혀있다. ‘과다한 약물 복용은 부작용을 초래할 수 있습니다.’ 스테로이드도 마찬가지다. 구역질, 좌창, 혹은 심각한 간손상 같은 부작용을 초래할 수 있다. 결국 2003년부터 메이저리그에서 스테로이드를 금지 약물로 규정한 이유는 훗날 신체에 미칠 수 있는 부작용과 메이저리그에 뛰고픈 어린 선수들이 빠져들 유혹을 처음부터 근절하기 위함이다.
○ 스테로이드를 사용하는 진짜 이유
그럼 도대체 선수들이 왜 스테로이드를 사용할까? 알려진 대로 근육을 키우고 힘을 길러 홈런포를 펑펑 터뜨리기 위해서일까? 하지만 실제로 선수들이 가장 많이 꼽는 이유는 부상 회복 촉진이었다.
특히 스테로이드의 직접적인 혜택을 입지 않는 것으로 알려진 투수의 경우가 더더욱 그렇다. 또한 염증의 억제로 인해 빠른 피로회복을 기대할 수 있다. 한 경기가 문제가 아니다. 다음 등판까지 빠르게 신체기능을 회복해서 긴 시즌을 치르는데 유리한 고지를 점할 수 있다. 즉, 선발투수의 경우 당장 던지는 경기에서 많은 이닝을 소화할 목적이 아니라 다음 선발 등판까지 빠른 회복이 강점이 되고 있다. 매일 대기하는 불펜 투수는 말할 것도 없다.
염증 억제는 어깨나 팔꿈치에 발생하는 근육 파손을 방지하는 효과로 이어진다. 타자의 경우는 잘 알려진 그대로다. 피로 회복이 빨라 더 많은 훈련을 할 수 있고, 이를 통해 빠른 근육 생성이 가능하다. 한마디로 짧은 시간에 워크아웃 효과를 극대화하면서 근육을 키우고 파워를 길러나간다.
○ 스테로이드 사용 선수 얼마나 되나
그렇다면 이런 유혹에 빠져든 선수들이 어느 정도나 될까? ‘약물에 취해’라는 책을 출간해 메이저리그에 약물파동을 불러온 과거의 슬러거 호세 칸세코는 “85%의 메이저리거가 사용한다”고 주장한다. 역시 스테로이드 복용을 시인했던 과거의 MVP 켄 캐미니티는 훗날 “좀 과장됐다”고 말하긴 했지만 “적어도 50%는 된다”고 하기도 했다. 이들의 말에 따르면 750명 메이저리그 로스터 중 적어도 400명 이상이 스테로이드를 사용한다는 결론이다.
그러면 조사에 따른 실제 수치를 살펴보자. 미 프로야구에서 약물 검사는 2001년 마이너 선수들을 대상으로 시작됐다. 이들 중 11%가 양성반응 또는 검사를 거부한 것으로 나타났다. 메이저리그에서는 2003년이 최초인데 비공식적으로 6% 전후가 양성반응이 나왔다고 전해진다.
○ 스테로이드와 성적의 상관관계
그렇다면 과연 스테로이드 사용은 선수들의 성적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미국의 사이버 매트릭스를 다루는 ‘베이스볼 프로스펙터스’의 조사에 따르면 스테로이드를 사용한 것으로 밝혀진 타자는 타율에서 1푼 정도의 향상과 약간의 장타 증가, 투수의 경우는 경기당 평균 방어율이 0.13 가량 낮아졌다.
흥미로운 것은 투수들은 볼넷허용이 높아지고, 삼진비율이 낮아졌으며, 홈런허용은 늘어났다는 결과이다. 빠른 회복이 지나친 자신감으로 이어졌고, 타자와의 섣부른 승부가 이같은 결과를 초래한 것으로 해석된다. 배리 본즈나 라파엘 팔메이로의 사례는 단순히 스테로이드를 ‘기적의 영약’으로 믿고 훈련을 게을리 한 것이 아니라 엄청난 훈련을 병행해 그 효과를 극대화했다고 볼 수 있다.
단, 스테로이드를 끊임없이 투여할 수는 없다. 남성 호르몬인 테스토스테론이 자연스럽게 신체 내 생산을 중지하기 때문에 중성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 ‘경기의 그림자’란 책에 의하면 ‘배리 본즈는 한 달에 한 주 정도 컨디션이 심하게 다운된다’고 불평을 하고 있다. 본즈가 스테로이드를 복용했다고 간주하더라도 그 역시 시즌 내내 이 약물을 투여했다고 보기 어렵다면 약물 복용의 주기가 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경기의 그림자’에서 본즈 스스로가 얘기한 것을 종합해 그 패턴을 살펴보면 2002시즌에 확연히 나타난다. 본즈가 46개의 홈런을 기록했던 2002시즌을 기준으로 약물을 복용한 기간으로 의심되는 3주간의 장타율은 0.878이고, 약물복용을 중단한 1주간은 0.533이다. 메이저리그 타자들의 평균 장타율이 0.430임을 감안하면 엄청나게 높은 수치이다. 또한 투여 기간으로 짐작되는 3주간 그가 생산한 안타의 34%는 홈런이다. 그렇지 않은 1주간은 19%에 그친다. 물론 약물 비투여 기간으로 추정되는 1주의 성적도 일반 선수들보다 상당히 높은 수준이다. 하지만 약물 투여를 했을 때와 그렇지 않을 때의 차이는 명확하다고 했다. 이런 패턴은 시즌 내내 지속되며 공식화되고 있다. 결국 그의 약물복용 의심은 이런 패턴에서도 피하기 어렵다고 발코(BALCO) 스캔들을 폭로한 샌프란시스코 크로니컬 기자들은 입을 모은다.
○ 결국 이겨내는 건 자기 자신이다
스테로이드 복용은 리그 사무국의 의지로 검사 강화와 강화된 벌칙으로 추방할 수도 있다. 하지만 마크 맥과이어가 복용한 것으로 추정되는 ‘신체 성장 호르몬’ 등은 섭취했다는 증거와 부작용을 약물 조사를 통해 적발하기가 어렵다고 한다.
마치 시대가 흐르면서 새로운 형태의 마약이 지속적으로 등장해 법망을 피해가듯 현재의 약물 검사를 피해갈 수 있는 또 다른 약물이 새롭게 등장할 수 있다.
한시도 마음을 놓을 수 없고 지속적인 경쟁을 이겨내야 한다는 압박감, 나이가 들면서 떨어지는 성적을 되살리고픈 처절한 몸부림, 오랜 기간 흘린 땀방울을 부상으로 허무하게 증발하고 싶지 않은 강박 관념, 더 나은 성적으로 매스컴과 팬들의 주목을 받고픈 욕심은 선수들에게 이런 유혹을 쉽게 떨쳐버리지 못하게 만든다.
‘훔치려고 마음을 먹으면 제 아무리 첨단 경보 시스템이라 할지라도 무용지물’이라는 대도들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결국은 어떤 새로운 약물이 등장하고 강한 유혹의 손길을 뻗쳐도 이를 받아들이거나 거부하는 것은 선수들의 몫이다. 본즈, 클레멘스, 팔메이로와 같은 선수들이 선수 생활 내내 스테로이드를 복용했다고 보는 이들은 없다. 그리고 스테로이드를 복용한다고 모두 이들과 같은 기록을 쌓을 수도 없을 것이다.
선수들은 순간의 유혹을 이겨내야 한다. 스테로이드가 되돌려 주는 것은 야구와 스스로에 대한 모독일 수밖에 없으니까.
송재우 | 메이저리그 전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