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마장에 가 보면 돈을 잃었다는 사람들의 변은 대략 이렇다.
“아! 글쎄, 분명히 A한테 걸려고 했는데 막판에 떨리더라고. 그래서 B에 걸었는데 A가 들어온 거야. 환장하지!”
판단력과 배짱은 그래서 친구이자 적이다. 특히 절정의 순간에서 둘은 친구가 될 것인가, 아니면 적이 될 것인가를 결정해야 한다. ‘대박’과 ‘파탄’은 이 순간의 결과이다. 누구도 책임져 줄 수 없기에, 무섭다.
바둑도 매한가지. 수를 다 읽어놓고 정작 둘 때는 손이 엉뚱하게 나가고 만다. 프로들도 마찬가지이다. 그래놓고 후회한다.
그 느낌은 ‘마치 뭔가가 내 손을 움직인 것 같다’에 가깝다. 더욱 무섭다.
<실전> 흑1로 끊은 수를 대국 뒤 이영구가 몹시 후회했다.
“말도 안 되는 수였다.”
<해설1> 흑1로 호구쳤으면 간단했다. 이것으로 흑은 우세를 지킬 수 있다. 백2에는 물론 흑3이다.
백2·4가 교묘하다. 팻감공장을 차리는 것 같기도 하다. 흑으로선 찝찝하기 그지없다. 상대가 뭔가 획책을 하고 있는 것은 분명한데, 그게 무엇인지가 모호한 것이다.
중앙에서 패가 났다(11-1, 14-△). 백16으로 시원하게 따내니 중앙 백이 오겹살처럼 두터워졌다. 바꿔치기지만 백에게 유리하다.
흑21로 <해설2> 1을 끊는 것은 안 된다. 이건 죽었던 백이 살아나게 된다.
“끄응∼”
이영구의 입에서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좋았던 바둑이 실수 하나로 뭉개지고 있는 것이다. 애당초 흑1로 끊은 수가 문제였다. 다 읽어놓고 손이 엉뚱하게 움직이고 말았다.
양형모 기자 ranbi@donga.com
해설=김영삼 8단 1974yskim@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