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이거즈의 상징 3인방 김응룡·선동열·이종범

입력 2014-03-25 06:40:00
카카오톡 공유하기
프린트
공유하기 닫기

김응룡 감독, 선동열, 이종범(왼쪽부터)은 타이거즈 역사에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인물들이다. 김 감독은 1980년대 선동열을 앞세워 타이거즈 전성시대를 활짝 연 데 이어 1993년 입단한 이종범을 전면에 내세워 ‘왕조’를 이어갔다. 스포츠동아DB

9차례 우승 ‘명장’ 김응룡…방어율 1.20의 선동열…해태·KIA 관통한 ‘야구천재’ 이종범

한국시리즈 최다 우승(10회)에 빛나는 ‘명문 타이거즈’는 숱한 스타플레이어를 배출한 한국프로야구의 ‘별 사관학교’였다. 프로야구 원년인 1982년 홈런왕 김봉연을 비롯해 김일권, 김준환, 김성한, 김종모 등으로 짜여진 초창기 ‘김씨 라인업’은 타 구단에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1983년 20승 고지에 오르며 첫 우승의 주역이 됐던 ‘타이거즈 원조 에이스’ 이상윤도 무수한 레전드 가운데 한명이다. 그러나 해태 시절부터 이어진 ‘명문 타이거즈’의 역사를 논할 때 반드시 빼놓을 수 없는 세 사람이 있다. 9차례나 우승을 제조한 승부사 김응룡 감독(73·현 한화 감독)과 ‘무등산 폭격기’로 유명했던 선동열(51·현 KIA 감독), ‘바람의 아들’로 사랑 받았던 이종범(44·현 한화 코치)이다.


● 타이거즈 역사를 빛낸 명장 김응룡 감독

김응룡 감독은 ‘별 사관학교’의 교장이었다. 최근 유행한 드라마의 제목을 빌리자면 ‘별에서 온 교장’이었다. 국가대표 4번타자를 도맡았던 김 감독은 현역 시절 거구에서 뿜어내는 장타력이 일품이었다. 실업야구에서 1965년과 1967년 홈런왕에 오르며 거포로서 한 시대를 풍미했다. 1981년까지 한일은행에서 코치와 감독을 지낸 김 감독은 미국유학을 거쳐 1983년 해태 감독으로 취임해 승부사의 전설을 시작했다. 2000년 11월 팀을 떠나기까지 18년간 무려 9차례나 팀을 한국시리즈 정상으로 이끌었다. 타이거즈 유니폼을 입고 통산 2121경기에서 1151승49무921패(승률 0.556)의 성적을 거뒀다.


● 해태 전성기를 이끈 ‘국보’ 선동열

선동열은 그 자체로 전설이다. 1985년부터 11년간 해태 마운드를 지켰고, 이 기간 타이거즈는 6차례 한국시리즈 우승을 거머쥐었다. 국내서 통산 146승40패132세이브, 방어율 1.20이라는 전대미문의 성적을 남긴 그는 1996년 일본프로야구 주니치에 입단해 4년간 10승4패98세이브, 방어율 2.79를 기록하며 ‘나고야의 태양’으로 각광받았다. 146승은 역대 한국프로야구 최다승 4위이며, 이 가운데 무려 29승이 완봉승이었다. 3시즌이나 20승 이상을 기록했고, 4차례나 다승왕에 등극했다. 특히 1986년(0.99), 1987년(0.89), 1993년(0.78) 작성한 3차례의 0점대 방어율은 그 누구도 쉽사리 범접하지 못할 역사로 남아있다. 주니치에서 은퇴한 뒤 삼성에서 2004년 김응룡 감독과 사령탑-수석코치로 인연을 다시 맺은 뒤 사령탑으로 데뷔한 2005년부터 2년간 삼성의 통합우승을 이끌었다. 2012년 고향팀 KIA로 돌아와 현재 사령탑을 맡고 있다.


● 해태와 KIA를 관통하는 ‘야구천재’ 이종범

광주제일고∼건국대를 거쳐 1993년 해태 유니폼을 입고 프로에 데뷔한 이종범은 신인으로는 처음으로 1993년 한국시리즈 최우수선수(MVP)에 올라 타이거즈 전성기를 이끌었다. 1994년 타율 0.393, 196안타, 84도루로 페넌트레이스 MVP를 차지하는 등 5년간 타이거즈의 2차례 우승에 기여했다. 1997년 한국시리즈 우승과 MVP 영광을 차지한 뒤 주니치에 입단해 3년 반을 뛰었다. 일본무대 첫 해 팔꿈치 부상을 당한 뒤 부진을 거듭하다 2001년 8월 해태를 인수한 KIA 창단에 맞춰 국내무대에 복귀했다. 2007년 타율 0.174로 고전했던 그는 재기에 성공해 2009년 팀의 통산 10번째 우승에 일조한 뒤 2012시즌을 앞두고 전격 은퇴를 선언했다. 통산 타율 0.297에 1797안타, 194홈런, 730타점, 510도루를 기록했다.

김도헌 기자



뉴스스탠드